[광화문에서/박원재]투표하고 싶은 사람들

  • 입력 2007년 5월 25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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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19일에 치러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하지 못했다. 해외 연수차 일본 도쿄에 가족과 함께 머물렀기 때문이다. 역대 선거에 개근한 ‘모범 유권자’는 아니지만 본의와 상관없이 투표권을 박탈당한 심정은 씁쓸했다. 고향 마을의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타향살이의 서러움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방법을 찾는다면 ‘해외 일시 체류자’의 투표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국에 주민등록이 남아 있다면 귀국해 투표하면 된다. 대기업 주재원 중 일부 ‘열혈 유권자’는 개인 휴가를 내서까지 주소지를 찾아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순간의 투표를 위해 비싼 항공료와 최소 1박 2일의 시간을 들이는 것은 솔직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유례없이 열기가 뜨거웠던 2002년의 대선을 그렇게 바다 건너에서 국외자로 지켜봤다.

투표일 저녁 재일교포 지인에게 이런 소회를 털어놓았더니 “그 정도면 행복한 푸념”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자신과 같은 교포들은 엄연히 한국 국적을 갖고 있어도 태어나서 눈을 감을 때까지 평생 투표소를 구경할 기회조차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 사는 ‘한국인’과 외국에 시한부로 머무르는 ‘일시 체류 한국인’, 그리고 나라 밖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교포 한국인’. 똑같은 한국인이지만 투표권이라는 문제에 부닥치면 건너기 힘든 신분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끄럽게도 그때 처음 깨달았다.

재외 국민의 투표권 논란은 대선이 있는 5년을 주기로 되풀이돼 왔다. 올해에도 재외 국민에게 투표권을 주자는 내용의 선거법 개정안이 여러 건 국회에 발의돼 있다.

교포정책 주무 부처인 외교통상부는 교포에게 투표권을 주는 데 부정적이다. 신중론자들은 교포들이 한국 국적이면서도 병역과 납세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외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고달픈지는 정부 당국자들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한국 국적의 재일교포는 출퇴근하거나 외출할 때 외국인등록증을 반드시 휴대해야 한다. 분쟁이라도 생겨 등록증을 제시한 다음에는 현지 경찰의 싸늘한 시선을 감수해야 한다. 교포들이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귀화를 거부한 대가로 해외여행, 취업, 사업 등에서 받는 불이익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다.

투표권 부여에 인색한 정부의 태도는 논리적으로도 모순이다. 일본 정부를 향해 재일교포의 지방참정권을 허용하라고 요구하면서 정작 자국 선거에 참여할 기회를 봉쇄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재외 국민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나라는 한국과 터키뿐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유권자 범위를 갑자기 넓히면 해외 부재자투표를 실시하는 데 기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한다. 최소한의 준비 기간을 확보하려면 늦어도 6월 임시국회에서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일반 체류자 110만 명과 영주권자 170만 명을 합해 280만 명의 신규 유권자는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변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재외 국민의 투표권은 단순한 표 계산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역사적인 문제다.

12월 19일 기자는 5년 만의 축제에 당당히 참가할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마음은 편치 않을 것 같다. 민의의 잔치에서 소외된 또 다른 ‘한국인’의 얼굴이 어른거려서다.

박원재 특집팀 차장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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