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와 함께 문화산책]컴퓨터시대 연필로 글쓰는 작가들

  • 입력 2007년 3월 30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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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뎃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둥글게 박였다. 연필을 이렇게 저렇게 잡아 봐도 줄어들질 않았다. 선생님은 대학 가면 없어질 거라고 하셨다. 맞는 말씀은 아니었지만, 대학 들어갈 즈음엔 한글프로그램이 널리 퍼져서 굳은살은 없어지지 않았어도 펜 잡을 일은 확 줄었다.

간단한 메모 말고는 펜을 써본 지 오래다(심지어 메모도 휴대전화 메모함에 쳐서 넣을 때도 많다). 오래 못 본 친구한테 편지 한 장을 써도, 하루를 정리하는 마음으로 찬찬히 일기를 써도, 일단 컴퓨터 파워 버튼부터 누른다.

연필은 골동품일까? 작가들도 대개 컴퓨터로 글을 쓴다. 원고를 청탁할 때면 e메일 주소부터 알리는 게 습관이 돼서, 한 시인의 ‘수제 원고’가 우편으로 도착했을 땐 가슴이 철렁했다. “우편으로 보냈다가 원고 분실한 적도 꽤 된다”는 작가들의 무서운 대사, 옛날 얘기인 줄 알았는데.

“나는 이 소설만은 연필로 쓰기로 결심했다. 왜 그런 결심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연필로 소설을 쓴 것도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오래 전의 일로부터 이 소설은 시작한다.”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중 단편 ‘뉴욕제과점’에서)

아주 오랜만에 연필을 들었다는 김연수(37) 씨. 공예품처럼 치밀하게 짜인 소설을 쓰는 그이지만 자전소설 ‘뉴욕제과점’만큼은 ‘연필 가는 대로’ 쓰기로 했다. 이 소설은 김천역 앞 뉴욕제과점 막내아들로 자라난 그의 성장기를 담은 것이다. “자전소설인 만큼 기억에서 불쑥불쑥 나오는 대로 쓰려니 컴퓨터보다는 연필이 맞을 것 같았다”고 한다. 작가는 “에세이 같은 소설”이라며 겸손해하지만, 이 소설은 물 흐르듯 읽히면서도 마음에 오래 남는 서정적인 문장들로 독자와 평론가의 사랑을 두루 받았다.

연필과의 거리가 아득할 것 같은 젊은 작가 중 의외로 수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설가 김중혁(36) 씨는 원고지 5장 분량 정도를 연필로 쓴 뒤 그 원고를 컴퓨터에 옮기면서 손보고, 또 다음 5장 분량을 손으로 쓴 뒤 그 원고를 컴퓨터 자판으로 두드리는 작업을 반복한다.

왜 그런 번거로운 일을? “이야기가 너무 빨리 진행돼서 내가 따라잡을 수 없을까 봐”서란다. ‘귀엽게도’, 연필로 원고 쓰다 주인공 얼굴도 그려보고 인물관계도도 그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지난해 장편 ‘귀신의 시대’를 낸 손홍규(35) 씨도 수작업을 한다. 컴퓨터를 못 쓰냐 하면 그렇지 않다. 손 씨는 에세이든 뭐든 다 컴퓨터로 쓰지만 오로지 소설은 원고지를 펴놓고 만년필로 쓴다.

수백 장 원고를 쓰다 보면 팔이 다 시큰거리지만, “뭔가 하는 것 같다는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손 씨가 만년필로 소설 쓰기를 고집하는 것은 노동으로서의 소설에 대한 경건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연필로 시를 썼던 적이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연필을 깎을 때의 향나무 냄새가 미칠 듯이 좋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연필을 깎을 때의 느낌이란 첫사랑의 아련한 슬픔과도 같아서 자꾸만 연필 끝을 뾰족하게 깎는 버릇이 생겼다.”

박형준(41) 시인의 산문집 ‘저녁의 무늬’의 한 부분이다. 시인의 섬세한 감성은 연필을 깎는 행위와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의 아픔을 이어놓는다.

이번 주말엔 사각사각 연필을 깎아서, 혹은 선물로 받았지만 쓸 일이 없었던 만년필을 꺼내서 노트에다 편지를, 일기를, 혹은 에세이를 써 보자. 어쩌면 첫사랑이, 또 어쩌면 잊었던 유년기의 기억이 끌려나올지도 모른다. 혹은 팔이 저린 만큼 문명의 이기를 새삼 감사하게 될지도.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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