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윤종]아베의 ‘국내용’ 논리

  • 입력 2007년 3월 30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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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종영된 의학 드라마였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그 드라마에 손이 멎은 건 의료사고로 숨진 환자 가족의 애절한 표정 때문이었다. “왜 힘없는 피해자가 의사 과실을 입증해야 하죠?” 과실이 없었다면 먼저 병원 측이 이를 입증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런 논지였다.

인술을 베풀기 위해 노력하다 실수를 저지른 경우와 반인류 범죄를 감히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계속되는 일본인들의 군위안부 관련 망언을 접하면서 드라마의 그 장면이 새삼 떠올랐다.

“부모가 딸을 팔았다.” “그들은 창녀였다.”… 표현은 달라도 주장의 초점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자신이 말한 ‘군이나 정부가 위안부 모집에 관여한 증거가 없다’는 데 모인다. ‘누군가 내 죄를 증명하지 않는 한 죄를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다.

누가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차트’는 일본 측이 갖고 있다. 열람을 강제할 수사 기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위안부 문제 같은 반인류 범죄에 관한 한 ‘증거 없음’을 무기로 무죄를 강변할 일이 아닌 것이다. 하루아침에 납치되거나 ‘공장에서 일하면 돈을 많이 주겠다’는 말을 미끼로 한 속임에 넘어간 할머니들이 생존해 있다.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수 없으면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낫다.

사실 무죄를 입증하겠다는 움직임이 없는 것도 아니다. 위안부 문제의 일본 정부 책임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뒤집겠다며 일본 여당 내에서도 ‘재조사’ 움직임이 활발하다. 아베 총리 자신이 취임 전 이 같은 움직임을 주도했다. 이런 기류라면 또다시 ‘찾아보아도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죄다’라는 논리의 비약이 불 보듯 뻔하다.

이 같은 논리는 자국의 골치 아픈 범죄를 잊고 싶어하는 일본 내부의 기류에 편승하는 데는 아주 유용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베 총리는 선거를 승리로 이끄는 데나 걸맞은 ‘국내용’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세계를 상대로 하는 강대국 지도자가 취할 논리는 아니다.

최근 미국에서 독일에 이르는 각국 언론의 심상치 않은 ‘일본 난타’가 이 같은 국내용 논리 때문에 초래된 점을, 미국 국무부까지 나서 일본을 비판한 점이 이 때문임을 일본인들은 제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 문제에 관해 가장 이웃의 마음을 끄는 발언은 고노 담화의 주인공인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일본 중의원 의장이 지난해 ‘아시아여성기금’과 가진 인터뷰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당시 그는 일본군의 자료가 ‘처분돼 버렸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료가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폐기됐으리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는 ‘담화를 발표한 책임을 피할 생각이 없으며, 담화를 취소할 생각도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

돌아보면 세상의 여러 문제가 그렇듯 이 문제 역시 ‘사람값’의 문제로 귀착된다. 아베 총리는 북한에 납치당한 일본인과 가족들의 아픔을 부각해 총리에 당선된 바 있다. 그가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두 세대 전 하루아침에 가족들이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 인권을 유린당한 조선 여인들의 아픔과 사람값도 존중해야 한다.

귀를 솔깃하게 하는 선거용 이슈에 이끌려 지도자를 선택한 나라가 일본뿐만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으로서는 그런 지도자가 ‘국내용’을 탈피할 수 있는 길이 아직은 열려 있다.

유윤종 국제부 차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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