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동거와 동침

  • 입력 2007년 3월 22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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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한 사람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부부가 30대엔 마주 보고 자고, 40대엔 천장을 보고 자고, 50대엔 등 돌리고 자고, 60대엔 각방을 쓰며, 70대엔 어디서 자는지도 모른다’라는 우스갯소리 말이다. 한이불 덮고 자는 사람들의 얘기는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함부로 짐작해서는 안 되지만 사석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동거(同居)’가 곧 ‘동침(同寢)’은 아니라는 암시를 받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한집에 살기는 하지만 동침하지 않고 소 닭 보듯 지내는 부부가 의외로 많음을 알게 된다.

조금 깊숙이 들어가 얘기를 나누다 보면 결혼 10년쯤 지나면 성적인 관심이 시들해지고 아이들 건사하느라 정신이 없다 보면 부부생활은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고 한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부부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해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섹스리스(sexless) 커플이 된다는 얘기다. 한국인의 못 말리는 교육열이 결국 부부관계를 소홀하게 만들고 세계적인 이혼율의 한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 부부를 지탱해 주는 끈은 부부의 사랑이 아니라 자녀들에 대한 책임과 의무인 경우가 많다.

언젠가 남편을 한국에 남기고 아이들 교육을 위해 몇 년간 외국으로 떠나는 여자 후배를 환송하는 자리에서 “남편이 너를 위해 수절(守節)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는 말을 지나치듯 조심스럽게 해 준 적이 있다. 후배는 대뜸 “내가 놀러가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 교육을 위해 고생하러 가는데 남편이 그것도 못 참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맞섰다. 그러나 다른 남자 후배가 나서 “보통의 성인 남자들에게 원만한 성생활은 윤리의 문제이기에 앞서 하나의 생리적 현상일 수도 있다”고 말하자 그는 더는 반론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어색해지긴 했지만 좌중에 침묵의 공감대가 형성됐다. 어찌 됐든 자녀 교육을 위해 부부가 장기간 헤어져 지내야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라는 데는 인식을 같이했다.

내가 아는 어느 교수 부부도 각방 생활을 한 지 오래다. 고부 갈등으로 서로 간에 신뢰와 애정을 잃었으나 부모의 사회적 체면과 자식의 장래를 위해 표면적 부부관계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들 부부가 부모와 자식을 위해 자신들을 너무나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결혼의 목표는 결코 효도나 출산, 자녀교육 같은 것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미국에서는 2년 전 아이 넷을 둔 주부 겸 작가인 아옐릿 월드먼 씨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나는 자식보다 남편을 더 사랑한다’라고 썼다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켜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토론까지 벌어진 적이 있다. 월드먼 씨는 쇼에서 ‘침실에 아이 사진을 둔 부부는 불행하다’는 논리를 펴며 자식을 품안에 가두지 않는 ‘팔 길이 정도의 거리를 둔 사랑’을 제안했다. “너희들이 우리 품을 떠나도 우리는 괜찮다. 우리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도 너희는 괜찮을 것이다”라고 가르치라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또 최근 미국에서 각방을 쓰거나 따로 자는 부부가 늘고 있어 2015년경에는 안방이 2개인 주택이 60%를 넘을 것으로 주택업자와 건축가들이 예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사회학자들은 그 원인을 성생활보다는 코골이나 아이들의 울음 등 ‘숙면적 요인’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지만 사랑이 숙면보다는 훨씬 더 소중하지 않을까.

언젠가 한 유명 부부의 인터뷰에서 아내가 “나는 아무리 남편과 다퉈도 베개를 갖고 남편 옆으로 쳐들어가지 떨어져 자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참 지혜로운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들 부부가 시련 속에서도 여전히 금실 좋게 살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오명철 편집국 부국장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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