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의 별]소설가 김별아의 ‘영원한 전사’ 황선홍

  • 입력 2007년 3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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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가 날았다! 지상의 모든 불운 한방에 떨쳐버리고…

이제와 새삼스레 고백하건대, 2002년에 즈음한 나의 목표는 한국대표팀이 월드컵에서 ‘첫 승리’를 얻는 것이었다. 4강까지는 꿈도 꾸지 못했고 16강 진출조차 쉽게 말할 수 없었다. 패기도 야망도 없는 지나치게 소박한 목표를 흉봐도 어쩔 수 없다. 본래 패기는 소중히 여기지만 야망은 별로 없는 개인적인 기질 탓이기도 하지만 1954년 스위스 대회에 처음 출전한 이래 5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도전과 좌절의 과정을 거듭 겪어야만 했던 한국 축구의 역사를 기억한다면 누구도 ‘첫 승리’의 목마름을 쉽게 폄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덧붙여 은밀하게 품은 소망 하나가 있었다. 그 ‘첫 승리’를 이끌어 내는 주역이 바로 그였으면 하는 바람, 지금껏 난무한 온갖 억측을 훌훌 벗어 뻥 차버려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자신, 그리고 그의 눈부신 골뿐이므로. 경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예감했다. 첫 골은 그의 몫이다. 담담하게 기다렸다. 그는 반드시 해낼 것이다. 그것이 육감이었는지, 직관이었는지, 단순한 믿음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어설프지만 확고한 육감대로, 직관대로, 믿음대로 그는 스스로를 명명백백히 증명했다.

왼쪽 뒤편에서 날아온 이을용의 낮은 센터링을 한순간의 지체도 없이 왼발로 감아 날렸다. 그림자처럼 달라붙던 수비수들이 맥없이 그를 놓쳤다. 리버풀의 전설로 불렸던 골키퍼 두데크가 몸을 날렸지만 역부족이었다. 오랫동안 끈질기게 괴롭혀 온 부상의 악몽도 그를 옭아매지 못했다. ‘똥볼’을 찬다느니 ‘아시아용’이라느니 하는 무책임한 말질도 더는 그를 구속하지 못했다. 날카로운 일격에 놀란 그물이 어지럽게 출렁였다. 눈이 화등잔처럼 커진 그가 그야말로 황새처럼 양팔을 펄럭이며 동료와 코칭스태프들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부르쥔 채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를 믿었다. 아니, 그를 알았다. 그를 알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황선홍. 내가 쟁쟁한 선수들 중에서도 그를 편애하는 이유를 굳이 밝히자면 우선은 당연지사 탁월한 실력 때문이다. 이회택과 차범근, 최순호로 이어지는 한국 축구 스트라이커의 계보에서도 그의 감각적인 플레이는 단연 돋보인다. 그는 적극적으로 몸싸움을 하면서도 영리하게 수비수들을 요리하며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 냈다. 키 큰 수비수들과 공중 볼을 다투어 자신의 것으로 삼고 창조적으로 기회를 만들어 내는 기술에서는 지금 현역으로 뛰고 있는 어떤 선수에게서도 좀처럼 만족을 얻어 낼 수가 없다. 그는 세련된 축구를 했다. 휘청거리는 듯 흐르는 물처럼 유연한 드리블은 막강한 체력을 자랑하는 수비수들에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여 얻은 결과물이었다. 강함과 약함, 부드러움과 거침이 동시에 그를 움직였다. TV 화면으로만이 아니라 경기장에서 뛰는 그의 모습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의 존재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2002년 월드컵 무대에서 문자 그대로 ‘한’을 풀기 전까지 누구보다 불운했다. 19세에 국가대표팀에 발탁돼 30대 중반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면서 뛴 경기는 A매치 103회를 포함해 총 240여 회에 불과하다. 연평균 22회 정도 경기에 출전한 셈이다. 그 나머지 시간에 그는 줄곧 부상에 시달렸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은 앞서 열린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무릎을 다쳐 출전조차 하지 못한 쓰라린 기억과 함께한다. 분데스리가 진출도 부상이 문제가 되어 좌절됐다. 꿈을 꿀 때마다, 도약과 비상을 시도할 때마다 그는 부상에 발목을 잡혔다.

하지만 부상보다 더 그를 괴롭힌 것은 그를 희생 제물로 삼은 집단적 폭력이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볼리비아전이 끝난 뒤부터 그는 언론과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기 시작했다. 그는 누구보다 많은 기회를 만들어 내는 선수였기에 그 기회를 놓쳤다는 비난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 부정적인 에너지가 얼마나 강했던지 그는 스물여덟 살의 창창한 나이에 심각하게 은퇴를 고려했노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 멍에는 황선홍의 선수 인생 전체를 관통했다. 잔인하고도 집요한 편견 앞에서는 K리그 8게임 연속 골, J리그 득점왕 등의 빛나는 기록도 소용없었다. 아아, 한낱 팬에 불과한 내가 치욕적이고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왜 축구를 즐기는가? 왜 인간의 가장 불완전한 신체인 발을 이용한 원시적인 경기에 열광하는가? 승리를 원한다면서 어째서 패배를 감당하지 않으려 하는가? 하지만 폭력적이고 광기 어린 비난과 폄훼에도 불구하고 끝내 “축구 선수여서 행복했다”고, “축구가 계속되는 한 어떤 모습으로든 경기장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고 말하는 황선홍을 바라보며 나는 축구가 결코 완전할 수 없는 인간의 완성될 수 없는 경기이기에 아름답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는 생존자다. 끈덕진 투쟁 끝에 스스로 부활한 별이다.

부언하자면 내가 황선홍을 좋아하는 이유에는 그와 내가 어깨동갑이라는 대단치 않은 친밀감이나 그가 날렵한 슈트를 잘 소화해 내는 멋쟁이라는 사소한 사실까지도 포함돼 있다. 그는 이제 선수 생활을 끝내고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내 추억 속에서 황선홍은 영원한 18번의 스트라이커다.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축구도, 삶도, 마지막 휘슬이 울릴 때까지는 아무도 결과를 알 수 없다. 우리는 또다시 살아남아야 한다.

김별아 소설가

■ “나에겐 그가 동방신기”

김별아(38) 씨의 축구 사랑은 유명하다. 2002년 월드컵 대회를 앞두고 ‘축구전쟁’이라는 소설을 냈고, 굵직한 경기 때마다 관전기를 썼다. 지난해에는 축구협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김 씨의 오랜 애정은 유년 시절의 체험에서 비롯됐다. 그는 강원 강릉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설기현 이을용 등 뛰어난 축구선수들을 배출해 낸 강원도는 축구라면 전 도민이 열광하는 분위기다. 축구로 유명한 강릉농고와 강릉상고의 경기는 ‘농상전’ ‘상농전’으로 바꿔 불리며 지역을 뜨겁게 달군다.

아버지, 남동생과 축구 경기를 보러 다니면서 김 씨는 자연스럽게 축구에 빠져들었다. ‘몸치’라서 운동장에서 같이 부대끼진 못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동네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축구공을 굴렸고, 큰 경기가 열릴 때면 마을 사람들이 한 집에 모여 TV를 보면서 응원했다. 자라면서 배구도, 야구와 농구도 좋아하게 됐지만 축구는 늘 최고의 스포츠였다.

“다 좋아서 어느 한 선수를 꼽을 수가 없었다”던 김 씨가 황선홍에게 ‘꽂힌’ 것은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볼리비아전부터였다. 경기에서의 부진으로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면서 황선홍은 상처받고 좌절했다. 그럼에도 무너지지 않고 비판을 극복하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에 김 씨는 팬으로서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됐다고 한다.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장기 체류 중인 김 씨는 수화기 너머에서 대학 시절 활약상부터 은퇴 후 지도자로 축구장을 지키는 모습까지 황선홍이 얼마나 ‘인간적인 전사’로서의 삶을 살았는가를 열정적으로 들려줬다.

그는 열심히 이야기를 하다가 “마치 소녀들이 동방신기 좋아하는 것 같죠”라면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축구협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황선홍과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별은 멀리 있는 게 좋다’는 생각에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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