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찬식]정치로부터 자유로운 문화

  • 입력 2007년 1월 2일 19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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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계는 지난해 정부에서 52억2000만 원의 로또기금을 지원받았다. 문인들의 원고료 수입은 월평균 18만 원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있을 만큼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문학계에 갑자기 큰돈이 쏟아진 것이다.

문화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지난해 1100억 원을 문화예술인들에게 지원했다. 2003년 300억 원의 3.6배에 이른다. 문화예술인들은 “이젠 정부 지원금이 부족해 창작활동을 못 한다는 얘기는 꺼낼 수 없다”고 말한다.

정권의 그물망에 걸려 버린 정신

그렇다고 예술가들이 저마다 꿈과 철학을 펼치는 ‘한국 문화의 르네상스’가 도래한 건 아니다. 사정은 정반대다. 요즘 문화계가 내놓는 작품들은 획일적이다. 유행에 쉽게 물들고 투철한 실험정신이 사라지고 있다. 어설프게 시류에 편승하는 작품도 적지 않다. 상업주의의 거센 물결 때문만은 아니다.

정부 지원금이 넘쳐 나는 데 마다할 예술가가 어디 있을까. 정부에서 지원금을 타 내려면 현실비판적이고 도전적인 작품보다는 누가 봐도 시빗거리가 없는 작품이 어울린다. 작가 자신도 모르게 그 틀에 귀속되고, 가장 경계해야 할 문화의 획일성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문학만 해도 정부의 ‘긴급 수혈’에 의지하면서 얼마나 치열한 삶의 영혼을 담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북한의 굶주리는 동포를 위해 누구보다 먼저 눈물을 흘려야 할 문인들이 북한 인권에 침묵하고 있는 것은 예술가정신의 상실이다.

물론 문화 지원은 필요하지만 지금처럼 정치적으로 계산된 지원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권이 문화계에 짜 놓은 그물망은 정교하고 탄탄하다. 4년 전 대통령선거 때 그들은 문화를 활용해 재미를 톡톡히 봤다. 국민의 중요한 일상에 문화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만큼 문화적 헤게모니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찍 간파했다.

정권을 잡자 더 바빠졌다. 문화 관련 기관에 대한 ‘코드 인사’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차원이 아니었다. 그들은 드러내 놓고 “우리는 혁명을 하고 있다”고 했다. 문화행정과 돈줄을 차지했다. 문화를 장악하고 의식을 지배하면 정권을 지속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음이 드러난다.

‘실패한 정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현 정권이 문화계에 미치는 힘은 4년 전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공고해졌다. 좌파 이념의 책들은 논술 열풍 속에서 필독 도서로 읽히고 있다. 대학가의 이른바 교양강좌는 학생운동권의 퇴조 속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다.

그래서 문화계는 안팎의 적을 동시에 마주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나아진 여건 속에 안주하려는 내부의 적과, 다시 찾아온 올해 대선을 앞두고 문화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외부의 끈질긴 기도가 도사리고 있다.

문화는 누가 어떤 의도를 갖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인간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조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문화는 정치의 도구나 이념의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치와 기존 질서를 거스름으로써 발전해 왔던 게 문화의 역사다. 예술가들의 깨어 있는 정신은 늘 아름답다.

문화계, 大選과 거리 둬야

정치가 문화계를 유혹하고 장악하려는 시도는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문화계 스스로 정치와 거리를 두고 유혹을 뿌리치는 일이 중요하다. 현 정권에 붙어 문화계를 앞장서 어지럽혔던 몇몇 인사는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가.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는 예술에 관한 한 타협을 몰랐다. 그가 바티칸 성당에 ‘최후의 심판’을 그릴 때 담당 추기경이 트집을 잡자 그는 ‘지옥의 사신’ 미노스의 얼굴에다 그 추기경 얼굴을 그려 넣었다. 권력에 대한 통쾌한 조롱이자 예술가적 기개였다. 대선을 앞두고 부작용이 우려되는 올해 ‘한국의 미켈란젤로’가 많이 나왔으면 한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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