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화제! 이사람]아시아경기 대표팀 이끄는 정현숙 단장

  • 입력 2006년 12월 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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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강병기 기자
도하=강병기 기자
《11월 28일 저녁 카타르 도하의 아시아경기 전용 공항터미널. 밖에는 교민들과 취재진이 한국 선수단 본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터미널 문을 뒤로 한 채 선수단을 이끌고 나온 사람은 크지 않은 체구의 단발머리 여성. 그는 1974년 열렸던 테헤란 아시아경기에서 여자 탁구 개인 단식에서 은메달을 땄고 한 해 전에는 사라예보에서 건국 이후 최초로 구기종목(여자 탁구 단체전) 세계 제패라는 위업을 이뤘다.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그가 다시 중동 땅을 밟았다.

이번에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은 메달 한두 개가 아니다. 금메달만 70개 이상을 노린다. 2006 도하 아시아경기 한국 선수단장 정현숙(54) 씨가 그 주인공이다.》

꼬박 13시간이 넘는 비행기 여정.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정 단장은 수많은 언론매체의 인터뷰 요청에도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 “대회 홍보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게 제가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 비행기 안에서 정장 대신 유니폼 입게 ‘작은 혁명’

“단장에 임명되리라곤 전혀 예상 못했어요.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지만 여성 체육인들의 활동 폭을 넓혀 갈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판단해 맡았지요.”

국내 첫 아시아경기 여성 단장이 된 정 단장의 말은 막힘이 없었다. 탁구 해설 등 방송활동을 통해 다져진 ‘내공’이 느껴졌다. 인터뷰 내내 목소리는 차분하고 조용했다. 목소리만 조용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세월 동안 여성 체육계를 위해 활동해 온 그가 나름대로 갖고 있는 지론은 ‘시끄럽게는 하지 말자’.

싸워가면서 의견을 관철하기보다 조용히 맡은 일을 잘해내면 여성의 역할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너무 수동적인 태도는 아닌가요?’라는 물음엔 단호하게 대답했다. “꼭 필요한 부분은 싸워서라도 얻어내야죠.”

정 단장은 11월 22일 한국선수단 결단식에서 ‘조용한’ 발표 하나를 했다. 장시간 비행기를 탈 때 불편이 덜하도록 출국하는 선수들에게 정장 단복 대신 유니폼을 입도록 한 것. 선수들은 모두 “편하다”고 했다.

○ “체육인 중책 맡았으면 집안일은 잊어버려야”

“냉정하게 말하자면 예전에는 여성에게 지도자를 맡겨 놓으면 집안일한다고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어요. 가정과 육아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지만 여성 체육인으로 활동하면서 가정과 육아 자체가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힘들다면 주변에 도움 줄 사람을 찾아야죠. 여자 탁구 대표팀 현정화 감독의 경우를 보세요.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지만 쉬지 않고 지도자로서 성공적인 길을 걸어왔잖아요. 현 감독 친정어머니가 아이 둘을 잘 돌봐주고 있기도 하지만 본인이 철저히 잘해 온 거죠. 제 경우도 친정어머니가 아이를 잘 키워 주셨기에 꾸준히 활동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남성 체육인과는 달리 여성이 육아와 가정, 그리고 일도 병행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얘기를 내심 기대했지만 조금 의외의 대답이다.

“다 잘할 수는 없어요.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그렇죠. 주변에 도와달라고 당당히 요구해야 합니다.”

○ 역도 등 비인기종목 없이 좋은 성적 못거둬

“종합 2위 목표에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일본이죠. 일본은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에서 한국에 참패하다시피 한 뒤 많이 달라졌어요. 그동안 신경 쓰지 않았던 엘리트 체육을 다시 키웠어요.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흔히 말하는 ‘비인기 종목’ 없이는 종합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다. 정 단장은 그런 종목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60%가 훨씬 넘는다고 했다. 인기 종목에 비해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운동하는 선수들에 대한 마음이 ‘짠하다’고 말했다.

“당장 내놓을 대안은 없습니다. 저만의 생각을 무작정 얘기할 수도 없고요. 하지만 여성 체육인들을 중심으로 조금씩 개선해 나갔으면 합니다. 지금까지는 조용히 해 왔지만 앞으로 조금 드러내 놓고 고민을 해야 될 것 같네요.”

정 단장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질문을 돌렸다. 이에리사 총감독과는 호흡이 잘 맞느냐고. 이 총감독은 ‘사라예보의 기적’을 함께 이뤄낸 절친한 후배다.

“이 총감독이나 저나 예민한 점은 잘 아니까 서로 피해가요.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으면 슬쩍 피했다가 나중에 얘기하곤 합니다. 호칭요? 다른 사람 앞에서는 이 감독, 이 촌장이라고 하지만 둘만 있을 땐 ‘에리사야’라고 부르죠. 하하.”

도하=이승건 기자 w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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