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교과서 깊이보기]행복의 묘약이 생긴다면 과연 인간은

  • 입력 2006년 11월 21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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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인류 최초로 만들어진 컴퓨터 ‘에니악’. 과학적 발명은 과연 인간의 뇌를 대체할 수 있을까.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46년 인류 최초로 만들어진 컴퓨터 ‘에니악’. 과학적 발명은 과연 인간의 뇌를 대체할 수 있을까. 동아일보 자료 사진
사람의 뇌는 몸 전체 에너지의 3분의 1을 쓴다. 신경학자 매컬로크는 인간 뇌와 비슷한 진공관 컴퓨터를 만들려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만큼의 공간에 나이아가라 폭포를 움직일 만큼의 전력, 그만큼의 냉각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처럼 뇌는 거대하고 복잡한 기관이다.

신경생리학자들은 1990년대를 ‘뇌의 10년’이라고 부르곤 한다. 그만큼 두뇌의 신비가 많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린필드는 21세기를 ‘마음의 시대’라고 평가한다. 뇌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제는 정신도 ‘두뇌 현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우울증 치료를 예로 들어보자. 전에는 치료자들이 상담으로 병을 고치려 했지만, 지금은 프로작(Prozac)이라는 알약에 더 의지한다. 프로작은 두뇌 호르몬 균형을 바로잡는 항(抗)우울제다. 애정이 없고 폭력을 곧잘 휘두르는 사람은 옥시토신이 부족하다는 진단을 받곤 한다. 옥시토신은 돌보고 보살피는 마음을 일으키는 호르몬이다. 새끼를 낳지 않은 쥐에게 옥시토신을 주사하면, 마치 어미처럼 어린 쥐들을 보살핀다.

음식으로 성격을 고치려는 노력도 한층 힘을 받고 있다. 문제아로 골머리를 앓던 미국의 위스콘신 중앙 대안학교는 급식을 바꾸는 것만으로 5년 만에 퇴학생이 하나도 없는 모범학교로 거듭났단다. 우리나라에서도 화학조미료와 패스트푸드가 두뇌에 나쁜 영향을 끼치고 성격을 광포하게 한다는 주장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제는 정신을 바로 잡는 일도 감기 치료와 별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음식과 약물이 상담이나 마음 수련이 하던 역할을 점점 대신해 가고 있다. 언젠가는 윤리 교육도 두뇌 호르몬 조절과 섭생 지도로 바뀌지 않을까?

백 여 년 전만해도 염병(장티푸스)이 돌면 사람들은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했다. 굿을 한다고 병이 나을 리 없건만, 이에 의지해서 멀쩡하게 살아나는 이들도 있었다. 위약(僞藥·placebo) 효과 탓이다. 가짜 약이라도 약효가 있다고 믿으면 환자는 힘을 얻고, 그러다 보면 면역력이 강해져서 병을 이겨낼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의학은 환자의 몸이 병에 저항할 능력을 키울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직접 병과 싸울 약품을 집어넣어 치료를 한다. 효과는 물론 현대 의술이 훨씬 높다.

정신 의학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상담과 명상으로 마음의 병을 고치려 했다. 좋은 생각을 하다보면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어 상처를 극복하게 될 터다. 그러나 지금은 필요한 호르몬을 직접 두뇌에다 주는 방법을 택한다. 치료 결과는 과거보다 훨씬 좋다.

그렇다면 행복도 이렇게 접근할 수 없을까?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참고 인내하는 법을 익힌다. 하지만 공부 잘하는 아이의 표정이 꼴찌 보다 항상 더 밝지는 않으며, 엄청난 재산과 명예를 쌓은 사람도 파산 지경에 이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살 유혹에 시달리곤 한다. 잘사는 나라일수록 우울증 환자와 자살자가 많다. 성공이 꼭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진짜 행복해지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수 천 년 동안 철학자들은 이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런데 최근의 두뇌 생리학은 새로운 방향의 해답을 제시한다. 만약 ‘행복감을 주는 약’을 찾아낸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노력 없이도 쾌감을 주는 물질은 지금도 있다. 술과 담배, 마약 등이다. 이런 약물은 건강을 해치고 불쾌한 뒤끝을 남긴다. 그러나 부작용이 전혀 없는 행복의 묘약이 나온다면? 하루에 식후 세 알 씩 먹으면 언제나 콧노래가 절로 나오게 하는 그런 약 말이다.

인간의 정신이 두뇌활동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아마도 멀지 않은 장래에 ‘행복의 묘약’이 발명될지도 모른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에 등장하는 ‘소마(soma)’도 바로 이런 부류의 약이다. 하지만 주인공 존 세비지는 알약이 주는 행복을 거부한 채, 자기는 신(神)과 문학을 원한다고 소리친다. 자기에게는 ‘불행해질 권리’가 있다고 말이다. 그의 선택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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