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찬식]‘역사 정치’ 약 될까, 독 될까

  • 입력 2006년 10월 24일 22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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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대개 답이 나온다.” 노무현 대통령이 자주 하는 말이다. 행사장 같은 데서 ‘역사 강의’를 많이 해 온 노 대통령은 실제로 현실정치의 ‘답’을 역사에서 찾은 흔적이 적지 않다.

노 대통령은 임진왜란 때 조선이 명나라에 작전지휘권을 내줬던 사례를 거론한 적이 있다. 6월 ‘군 주요 지휘관과의 대화’ 자리에서다. 조선 왕조의 긴급 구원 요청을 받고 4만3000명의 군대를 보낸 명나라가 조선군을 명나라 군대 안에 편입시켰던 일을 말한다.

불안한 인식에선 해답 안 나와

그는 “명나라 군대는 작전권을 가져간 뒤 조선 대신을 불러다 곤장을 치고 왕을 바꿔 버리겠다고 했다”며 “남에게 의지하면 그런 일이 생긴다. 남에게 우리 미래를 맡기는 일은 하지 말자. 번번이 실패했다”고 말했다. 한미가 공동 행사하고 있는 전시작전통제권을 단독 행사하겠다는 의지가 이런 사례를 통해 더 공고해졌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6월 포털 사이트 관계자들과 만나 “개방하지 않고 교류하지 않는 나라 중에는 흥한 나라가 없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대원군의 쇄국이 우리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데 얼마만큼 역할을 했는지 잘 몰랐다”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도 그의 ‘역사 공부’가 꽤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노 대통령은 역사에 심취했던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역사책을 부지런히 읽는다는 그는 “역사의 인과관계를 내다보면서 하나하나 해 나가겠다”고 말한다. 옛 경험에서 지혜를 구하는 것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의 ‘역사 정치’가 불안한 것은 역사 인식의 진폭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고 말한 자학적 역사관은 좌파 주도의 과거사 청산으로 이어져 사회 분열을 초래했다.

그러던 그가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부모 세대와 우리 세대는 위대하다.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세계 최고의 업적을 이뤄 냈다”고 찬탄하고 있으니 종잡을 수 없다.

“우리는 중대한 시기에 분열로 망했다”며 비관적인 인식을 드러내는가 하면 반대로 낙관적이기도 하다.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노 대통령은 “100년 전 역사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여간해서는 전쟁이 나기 어려운 상황으로 역사가 진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핵실험을 자행하고 ‘북한이 핵을 사용할 곳은 한국뿐’이라는 말까지 나오는데도 노 대통령의 생각은 변함없을까.

그가 임진란 때의 지휘권과 지금의 전시작전권을 단순 비교해 전시작전권을 찾아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는지, 아니면 전시작전권을 찾아오고 싶은 마음을 갖고 역사책을 살피다가 그런 사례가 눈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쪽이든 문제다. 섣불리 역사를 판단하거나 ‘보고 싶은 역사’만 보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통령이 되고 나서 그런 역사를 처음 알았다”거나 “그 책을 보기 전까지는 몰랐다”는 대통령의 말을 들으면 허탈한 심정에 빠지게 된다.

겸허하고 다층적인 접근을

양식 있는 역사학자는 가치판단을 내릴 때 말을 삼간다. 동학농민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고부군수 조병갑의 증손녀로 밝혀진 조기숙 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이 “학계에선 증조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오류일 수 있다는 논문이 발표된 적 있다”고 항변한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역사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성격을 띤다.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단순 명쾌한 역사는 실제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이는 역사엔 선과 악이 없고 객관적 사실만 존재한다고 했다던가. 노 대통령의 말처럼 오늘의 정치는 내일의 역사가 될 것이다. 그의 ‘역사 정치’가 남은 임기라도 바른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 텐데….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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