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정훈]육군 대장보다 높은 대법관

  • 입력 2006년 10월 20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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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법원행정처의 한 판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안대희 대법관이 참 마음고생이 심할 텐데….”

법원과 검찰이 사사건건 맞붙으면서 친정인 검찰을 떠나 이제는 법원에 몸담고 있는 안 대법관의 처지가 얼마나 옹색하겠느냐는 것이다.

검사들 역시 안 대법관 얘기가 나오면 비슷한 걱정을 한다. 대검찰청 중수부장 시절 대선자금 수사로 ‘국민 검사’란 칭호를 얻은 그는 아직도 검찰 후배들에게 “대법관이 아닌 검사장으로 불러 달라”고 할 만큼 검찰에 대한 애정이 뜨겁다.

18일로 취임 100일을 맞은 그 역시 이전의 검찰 출신 대법관들과 마찬가지로 수사가 아닌 재판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고달픈 수습 기간을 보내고 있다. 매일 산더미 같은 재판 기록과 전쟁을 치러야 하기에 이전에는 저녁 자리에서 종종 마시던 폭탄주를 끊었다.

그런 사정을 알아서인지 대법원 사람들은 안 대법관에게 “대법원에 와 주셔서 정말 고맙다”며 귀한 손님으로 모시는 분위기다. 그럴 때마다 그는 허허 웃으며 “육군 대장보다 대법관이 더 높지 않습니까”라고 받아넘긴다고 한다.

대법관이나 육군 참모총장이나 똑같은 장관급이지만, 장관급 의전 서열이 국무위원-대법관-국회의원-검찰총장-합참의장-3군 총장 순이니 끗발의 차이가 있을 법하다.

안 대법관의 비유는 사법부의 폐부를 찌르는 말이다. 세상이 바뀌어 법치주의가 확립돼 가면서 대법관의 권위나 역할이 커졌다는 얘기이지만, 뒤집어 보면 과거 군사정권 시절 권력의 눈치를 봐야 했던 사법부의 상황을 아프게 건드린 말이다.

문제는 대법관이 이제 육군 대장보다 높아졌는지 모르지만 사법 불신은 여전하다는 데 있다.

전직 판사들이 연루된 법조비리 사건 재판에서는 룸살롱 마담이 증인으로 나오고 하룻밤 술값이 600만 원이나 되느냐, 과연 술값뿐이냐는 얘기가 오가는 실정이다. 며칠 전 서울고법 국정감사에서는 “대법원이 전관예우의 몸통”이라는 지적까지 나왔다.

사법 불신에는 법원이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하다는 인식이 투영돼 있다. 선거법 위반 사건에서 벌금 100만 원 미만의 봐주기 선고가 남발되고, 국회의원 임기가 다 끝나가도록 재판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현실 때문이다.

12명의 대법관 중 유일한 외부 인사인 안 대법관은 그런 점에서 법원에 새로운 기풍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의무도 지고 있다.

20여 년 동안 특수부 검사로 ‘거악’과 맞서 온 안 대법관조차 벌써 강력한 도전자를 만나고 있다. 7월 11일 함께 취임한 대법관 동기생이자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인 전수안 대법관은 짧은 수습 기간에 벌써 3명의 금배지를 날렸다.

정치인 사건만 만나면 이유 없이 뭉그적거려 온 기존 법원의 태도와는 달리 속전속결이어서 “전수안에게 걸리면 국물도 없다”는 말이 나온다. 신임 대법관이기에 “새로 기록을 검토해 봐야 해서”라고 핑계를 댈 만하지만, 그런 예단에 코웃음이라도 치듯 전 대법관은 8월 24일 이정일, 9월 14일 이호웅, 9월 28일 김홍일 의원까지 줄줄이 의원직 상실 형을 선고했다.

사법부가 사는 길은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두 대법관에게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육군 대장보다 높으면 뭐하냐는 소리까지 들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김정훈 사회부 차장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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