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윤종]퍼스트레이디의 문화외교

  • 입력 2006년 10월 9일 19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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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재키의 프랑스 방문에 동행하고 돌아온 그의 남편입니다.”

1961년, 프랑스에서 귀국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전용기에서 내려 이렇게 말했다. 며칠 전 케네디 부부를 맞이한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는 ‘자클린’을 외치는 프랑스인들의 환호로 뒤덮였다. 뉴스의 진짜 주인공은 케네디 자신이 아니라 부인이었다는, 남편의 애교 있는 불평이었다.

재클린의 친정인 부비에 가문이 프랑스 출신이었다는 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방문 전 프랑스 TV는 32세의 젊은 미국 퍼스트레이디와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재클린은 유창한 프랑스어로 답변했다. 카메라는 프랑스의 유화를 비롯한 예술품으로 새롭게 장식된 백악관 곳곳을 비췄다.

무대를 700여 년 전 동아시아로 옮겨 보자. 당시에도 이 지역 일대에는 ‘한류’ 바람이 불었다. 그 주인공 역시 여인이었다.

고려 땅에서 태어나 공녀(貢女)로 낯선 원나라 땅에 끌려 간 그는 이윽고 순제(順帝)에게 차를 올리는 궁녀로 선발됐다. 원사(元史)는 기(奇)씨 성을 가졌던 그가 ‘총명함으로 총애를 받았다’고 쓰고 있다. 마침내 황후가 된 그는 만인의 ‘아이돌’이 됐다. 원의 풍속을 따를 만도 했지만, 기 황후는 고려 옷을 입고 고려 음식을 들었다. 귀족층이 ‘고려 스타일’ 흉내를 내면서 대도(大都·오늘날의 베이징·北京)에는 이른바 ‘고려양(高麗樣)’이 넘쳐 났다.

시대도, 지역도 다른 두 여인의 노력이 위대한 결실을 보기에는 힘이 달렸다는 사실을 한탄해야 할까. 1960년대 내내 독자노선을 추구하던 프랑스와 미국 사이에는 냉랭함이 감돌았다.

기 황후는 어땠던가. 순제를 움직여 당시 원의 종속국이던 고려에 혜택이 갈 만한 일을 했을까. 그럴 틈도 없이 황후는 명의 시조 주원장에게 패배한 순제를 따라 몽골 평원으로 도피해야 했다.

미완의 결실로 끝난 두 사람의 노력이었지만 분명한 사실이 남는다. 힘을 가진 자가 지도 위에 금을 그으며 무기와 자원의 배치에 골몰하고 있을 때 바로 곁의 누군가는 뭔가 다른 꿈을 꾸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예술과 의복, 문화 콘텐츠를 통해 멀리 떨어진 땅의 사람들을 가깝게 만들었다.

어제 한국과 정상회담을 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부인 아키에(昭惠) 여사가 열렬한 한류 팬이라는 사실은 그 때문에 더욱 반갑게 다가온다.

‘남편은 재무장과 역사인식 문제에 있어서 강한 일본 정책의 기조를 유지하고, 부인은 양국민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강온 작전의 일환 아닐까.’ 의구심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지나친 경계는 필요 없을 듯하다. 이웃 간의 참다운 대화란, 상대방도 나와 마찬가지로 깊이 사랑할 줄 알고, 아름다움에 똑같이 찬탄할 수 있는 인간족의 일부라는 사실을 느끼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던가.

1989년, 조지 W 부시 현 미국 대통령의 모친 바버라 부시 여사가 한국을 찾았을 때의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당시 바버라 여사는 한글 휘호로 한국인을 기쁘게 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당시 외국 정상의 부인이 한국에 친근감을 표시할 수 있는 방법이 ‘한글 서예’ 정도였던 듯하다.

그때와 비교해 보면 이웃에 자랑할 수 있는 우리의 문화 텍스트는 오늘날 얼마나 풍부하고 다양해졌는가. 즐겁지 않은가.

유윤종 국제부 차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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