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김봉렬]‘생명의 건축’ 날개를 펴라

  • 입력 2006년 9월 23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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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년 정조 임금은 신진 관리였던 정약용에게 새로운 도시와 성곽을 설계하라고 명한다. 정약용은 1년간의 연구 끝에 ‘성화주략’이라는 건축 건설연구서를 집필했고, 그의 이론대로 수원에 화성을 건설하게 됐다.

화성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과학적 공법으로 지어져 견고하고 전투, 특히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구조다. 예를 들어 성문 위에는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큰 물탱크를 놓아 적의 화공을 무력화하기 위한 장치다.

화성의 과학적 정신은 공사과정에서 더 빛났다. 바닥판을 수평으로 유지하는 특별한 수레를 고안해 운송효율을 높였고, 중국식 크레인을 개조한 거중기는 원품보다 작업능률을 4배까지 향상시켰다.

또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차등 성과급제를 적용해 작업품질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공사기간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었다. 200년 후에는 한국을 대표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

20세기의 위대한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외치면서 새로운 건축을 구상했다. 산업혁명으로 사회적 생산력은 급증했고 시민은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택은 여전히 1m에 가까운 두꺼운 돌 벽 속에 갇혀 있었고, 일반 시민이 살기에는 너무 불편했고 비쌌다.

벽 두께를 20cm 정도로 줄이고, 방과 창문의 크기를 규격화 표준화하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또 고층화 기술을 도입해 토지 이용률을 높여 주택가격을 거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일 수 있었다. 이런 혁신이 없었다면, 우리 대부분은 무주택자이거나 판잣집 정도를 전전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의 건축 수준에 대한 비판이 많지만, 이나마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 역시 건축가의 크고 작은 노력에 힘입었다. 1970년 촉망받던 젊은 건축가 조창걸은 부엌가구 전문회사인 한샘을 설립하고 여기에 다걸기(올인)한다.

싱크대의 개념조차 희박했던 시대였지만 부엌의 혁명이 주부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며, 0.5cm를 다투는 정교함과 인체과학의 지식이 훌륭한 부엌가구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의 예측은 정확했고 노력이 결실을 거둬 불과 20년 사이에 모든 집에 시스템키친이 설치되는 사회가 됐다.

좋은 건축이란 쓰기 편하고 튼튼하며 아름다운 집이다. 정의는 간단하지만 만들기는 쉽지 않다. 건축이란 문화예술과 과학기술의 두 날개로 사회를 행복의 나라로 인도하는 과정이다. 우리의 날개는 아직 힘이 약하고 두 쪽의 균형도 맞지 않았다.

세계를 여행하면 한국의 자연이 얼마나 아름답고 비옥한지 깨닫는다. 동시에 조악한 건축물이 아름다운 자연을 해치는 몇 안 되는 나라라는 사실도 깨닫는다. 심지어 한강의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서울 강남의 고급 백화점까지 붕괴되지 않았는가.

21세기 도시와 건축은 더욱 복잡하고 거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자원 고갈과 생태환경 파괴라는 전 지구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아직도 큰 집, 높은 집, 새 집만을 선호하는 한국의 재개발 병은 건축생태계의 악순환 고리를 확대하고 있다.

지금 큰 관심 속에서 추진되고 있는 건축기본법 제정과 건축도시연구원 설립은 제도적인 인프라 구축이라는 면에서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제도는 제도일 뿐이다. 건축인 스스로의 자성과 노력이 더 절실하다.

변화하는 시대에 대응하고 선도할 수 있는 넓은 시야와 창조적 실력을 쌓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훌륭한 제도라도 잠자고 있는 건축을 깨우지는 못한다. 깨어 있는 자만이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25일은 건축의 날,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 보자, 건축이여.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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