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아마추어들이 북 치고 장구 치면…

  • 입력 2006년 9월 8일 19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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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국가의 특성상 대통령, 국무총리, 외교통상부 장관, 통일부 장관, 국방부 장관, 국가정보원장 중 적어도 한 사람은 남북관계에 밝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6분의 1의 원칙’이라고나 할까. 역대 정권도 대개는 그랬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 때는 대통령부터가 전방에서 북과 대치한 경험이 있는 전문가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남북문제에 정통한 사람 한두 명을 반드시 요직에 앉혔다. 김영삼, 김대중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정권만 예외다. 대통령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 취임 이래 나머지 다섯 자리도 남북문제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로 채워졌다. 첫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세현 씨가 그나마 전문가였다. 이종석 현 통일부 장관이 있긴 하지만 대북(對北) 실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은 아니다. 북한 노동당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이러다 보니 정책 논의 과정에서 견제 및 여과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현안을 잘못 파악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바로잡아 줘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것이다.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니 그냥 넘어가는 식이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노 대통령은 지난달 9일 연합뉴스와의 회견에서 “앞으로 남북이 군사적 신뢰 구축을 위해 군사협상을 할 때도 반드시 한국군이 전시(戰時)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어야 대화를 주도할 수 있다”고 했다. 대통령 말대로라면 그동안 우리가 전시작전권을 갖고 있지 않아서 북이 군사 대화를 기피했다는 얘기가 되는데, 과연 그런가.

1988년 11월 16일 북한 정무원 총리 이근모는 남한의 이현재 국무총리에게 “고위급 정치군사회담을 열고 남북 무력(武力)의 단계적 감축을 논의하자”고 제의한다. 그의 제안에 따르면 남북은 1989년 말까지 군대를 각각 40만 명으로 줄인 후, 1992년부터는 10만 명 이하로 유지하는 것으로 돼 있다. 선전 선동 냄새가 나긴 했지만 획기적인 군축 제안이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55년 8월 14일 김일성 수상은 8·15광복 10주년 기념대회 연설에서 “남북 당국 간에 무력 불사용을 선포하자”고 제안한다. 이는 남한을 군사협상의 당사자로 인정한 것이다. 1962년 6월 21일 최고인민회의의 대남(對南) 서한, 1963년 12월 1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합동회의의 호소문도 내용이 같다. 1972년 1월 10일에는 김 수상이 “정전협정을 남북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자”는 제의까지 한다.

북이 남을 배제하고 미국과 직접 평화협정을 체결하겠다고 나선 것은 1974년 3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3차 회의에서 허담 외교부장의 보고를 통해서였다. 1년 전인 1973년 1월 27일 미국과 월맹 간에 조인된 파리평화협정에 자극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북은 그 후에도 남한을 당사자로 인정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2000년 9월 24일 사상 첫 남북 국방장관 회담이 제주도에서 열릴 수 있었겠는가. 2004년 5월과 6월에 열린 두 차례의 장성급 회담은 또 어떻고.

그런데도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전시작전권을 환수해야 군사 대화도 잘된다’고 하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노 대통령의 말은 북의 반미자주화(反美自主化) 주장에 말려든 느낌마저 준다. 북은 “주한미군이 있는 한 남은 미제(美帝)의 식민지이며, 따라서 미군 철수가 선행되지 않으면 군사 대화가 어렵다”고 주장해 왔는데 이를 받아들이는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대통령의 발언을 말렸어야 할 사람들이 앵무새처럼 따라 했다는 데 있다.

송민순 대통령외교안보정책실장은 지난달 10일 언론 브리핑에서 “남북한이 평화체제 수립의 당사자가 되려면 자기 군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고, 일주일 뒤 윤광웅 국방부 장관은 국회에서 “한국군이 (북의) 대화 당사자로서 자격이 없다는 북의 주장이 이유가 있다”고 했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까지도 지난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전시작전권이 환수되면 한반도 평화체제 협의를 위한 여건이 조성될 것”이라고 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발언의 옳고 그름도 모르고, 전시작전권 환수를 군사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스스로 못 박기까지 했으니 제 손으로 제 발을 묶은 꼴이다. 몰라도 너무 모른다. 이런 사람들이 전시작전권 환수를 서두르니까 국민이 불안해하는 것이다. 걱정이다.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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