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윤종]假定의 역사란 없다

  • 입력 2006년 9월 4일 20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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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동아일보 국제면에는 영국 소설가가 쓴 ‘가상의 세계사’가 소개됐다. 만약 로마제국이 몰락하지 않았으면 세계는 어떻게 됐을까. 로마는 아시아와 미 대륙까지 동화시켜 ‘세계 통일’을 이뤘을 것이다. 만약 이슬람 문명권에서 비행기가 발명됐다면? 유럽 아이들도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을 것이다….

대체역사(Alternative History)는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 줌으로써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누구나 ‘개인의 대체역사’를 갖고 있다. 예컨대 ‘그때 프러포즈를 승낙하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이라는 식이다. 문학에서도 서구의 SF장르까지 갈 필요가 없다. 조선시대의 ‘원더우먼’이 청나라의 침입을 물리친다는 대체역사소설 ‘박씨부인전’에는 굴욕의 역사를 자부심으로 승화하고자 한 민간의 원력(願力)에너지가 드러난다.

때맞춰 본보가 만난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인터뷰 기사를 다시 펼쳐 본다. 역사학자답게 그의 인터뷰는 풍성한 ‘가정법의 텍스트’다. 맥아더는 ‘만약’ 19세기에 태어났다면 더 어울렸을 인물이며,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논의가 ‘만일’ 1970년대에 이루어졌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논법이다.

특히 그의 인터뷰에서 눈에 띄는 가정법은 오늘날 한반도의 모습을 결정지은 6·25전쟁과 관련된 부분이다. “만약 김일성이 한반도를 통일했다면, 그는 한국을 지금의 평양 정권과 마찬가지로 매우 민족주의적인 독재국가로 바꿔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병영국가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1970년대엔 중국이나 베트남과 같은 길을 걸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김일성이 1950년대에 공고한 1인독재의 기반을 구축한 데는 반도의 남쪽에 세계 최강의 미군이 자리 잡고 있다는 극한적인 상황이 절대적 역할을 했다. 만약 북한이 한반도를 무력 통일했다면? 박헌영이 이끄는 남로당계는 조국통일의 공훈세력으로서 김일성계를 견제했을 것이다. 노동당 내부의 다른 파벌들도 어느 정도는 독자적인 목소리를 냈을 것이다. 최소한 오늘날과 같은 세습 독재체제는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점에서 김일성, 김정일이야말로 분단 상황의 절대적인 수혜자다. 휴전선 남쪽의 다른 누구를 수혜자로 거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적화된 통일 ‘조선인민공화국’은 과연 커밍스 교수의 가정처럼 중국이나 베트남과 같은 개방노선으로 전환될 수 있었을까. 어느 정도 다원적인 정치체제가 보장된다는 전제 아래서는 가능한 공상이다. 그래도 찬사를 보낼 만한 성과가 나왔을 것 같지는 않다. 이웃 얘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우리가 현재 중국이나 베트남 정도의 발전단계에 놓여 있다면 만족할 만한 일일까.

최근 대통령도 즐겨 ‘국가의 위상과 권위, 자주’를 입에 올리고 있다. 국가의 권위와 존엄이란 무엇인가. 평양 정권이 즐기는 방식의, 마이크에 대고 엄포 놓는 존엄은 신기루일 뿐이다. 국가의 존엄이란 그 나라의 국민이 누리는 인간다운 삶의 질로, 그 하나하나가 세계무대에서 존중받는 가치로 평가돼야 한다. 그러므로 분단된 조국의 반쪽이나마 ‘자유와 민주’에 가치를 둔 편에 줄을 섰다는 사실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이 사실만큼은 어떤 ‘가정법’으로 대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유윤종 국제부 차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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