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임규진]금융허브

  • 입력 2006년 4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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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전 의장은 “금융허브로 성장하려면 지리적 조건보다 제도적 기반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정치에 영향을 받지 않는 법을 완비하고 규제를 제거해 시장참여자들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어제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금융센터 정상회의’에서 화상(畵像)연설을 통해 금융허브의 조건을 제시하면서 제도 말고도 충분한 시장 규모, 건전한 투자 문화, 금융 전문가 배출 시스템을 강조했다.

▷서부 유럽 금융허브인 룩셈부르크를 다녀온 금융인 P 씨는 “사람들이 여러 언어를 구사하고 무척 친절했다”며 “외국 금융인들은 룩셈부르크에 오면 고향에 온 것처럼 편하게 느낀다”고 말했다. 이런 사회문화적 환경과 벨기에 프랑스 독일에 둘러싸인 지리적 이점에다 편리한 금융제도와 풍부한 전문 인력까지 뒷받침되자 각국의 금융기관들이 몰려들었다. 룩셈부르크는 영국과도 경쟁하는 금융 강국이 됐다.

▷서울에서 비행기로 2시간 30분 거리 안에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도시가 43개나 된다. 또 한국의 경제규모는 세계 11위이고 외환보유액은 세계 4위다. 서울은 동북아의 금융허브가 될 지리적, 경제적 여건을 비교적 잘 갖춘 셈이다. 그래서 참여정부도 2003년 국정과제로 동북아 금융허브전략을 내놓았다. 이후 자본시장통합법안을 내놓는 등 제도 개혁에 노력해 왔지만 구체적 실적은 지지부진한 실정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정부 규제, 노사 관계, 세금 인센티브, 외국인 거주환경, 영어 구사능력 등의 경쟁력 조건은 아시아 꼴찌다. 세계은행이 발표한 ‘2006년 사업 환경’에서 한국의 기업 활동 여건은 27위다. 이미 아시아 금융허브인 싱가포르와 홍콩은 각각 2위와 7위다. 그린스펀 전 의장은 화상연설에서 “서울이 점차 진보하면 매우 중요한 국제금융센터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금융허브는 말로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조건의 진화(進化)’가 선행돼야 한다는 얘기 아닌가.

임규진 논설위원 mhjh2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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