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연수]중재위 가는 날

  • 입력 2006년 4월 8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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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15층 언론중재위원회.

“정부는 근로자 서민 등에 대한 비(非)과세 및 감면 혜택을 줄일 계획이 없습니다. 동아일보 기사는 잘못됐으니 반론보도를 실어줘야 합니다.”

“정부 주장은 앞뒤가 안 맞습니다. 1, 2인 가구의 근로소득 추가 공제 폐지를 추진한다고 해놓고 근로자 서민 등에 대한 비과세를 줄일 계획이 없다니요?”

벌써 2시간이 흘렀다.

‘양극화 대책이 되레 서민 울린다’는 보도에 대해 재정경제부가 반론보도를 신청한 건을 놓고 재경부 대리인과 본보 대리인이 중재위에서 설전을 벌인 것.

독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요즘 신문사 편집간부들은 신문을 잘 만드는 것 외에 가욋일이 생겼다.

정부가 툭하면 정정보도나 반론보도를 신청하는 통에 여기에 일일이 대응해야 한다.

중재위는 현직 판사가 참석하는 준(準)법정이다. 원고와 피고가 아니라 신청인과 피신청인이긴 하지만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 올라오는 안건들을 보면 “뭐 이런 걸 다 신청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정부 스스로 시인했거나 정황이 명백한 사안, 정부의 반론을 충분히 실은 기사까지 조정 요청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한번은 건설교통부가 정정보도를 신청했다.

“살기 좋은 도시 만들기는 정부가 원래 추진하던 것으로 지방선거와는 관계가 없다.”

“대통령이 지난해 7월 ‘콘셉트를 잘 살려서 내년 지자체 선거 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까지 했는데 어떻게 관계가 없나. 언론이 이런 문제 제기도 못하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이 왜 필요한가.”

두 건 모두 ‘불성립’으로 끝났다. 이는 조정이 성립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여기에 불만이 있으면 정식으로 법적 소송을 내면 된다.

공무원들의 사정도 딱하다. 국민을 위해 정책을 만드는 ‘본업’에 충실하고 싶어도 청와대나 국정홍보처가 비판적 신문에 대해 ‘적극 대응’을 요구하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정책을 제대로 알리는 일은 중요하다. 잘못된 보도가 있다면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불리한 보도에 대해서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일단 법적 대응부터 하는 정부를 정상적이라고 보긴 어렵다.

최근 몇 년간 중재위 반론 및 정정보도 신청 가운데 30% 정도는 국가기관 및 공공단체가 낸 것이다. 국가기관 및 공공단체의 신청은 2001년 85건, 2002년 65건이었으나 2003년 224건, 2004년 253건, 2005년 199건으로 현 정부 들어 급증했다.

중재위는 본의 아니게 언론보도로 피해를 본 ‘힘없는’ 개인들을 돕는 기관이지 ‘권력을 쥔’ 정부가 언론에 시비를 거는 도구가 아니다.

정부가 정책에 대해 합리적으로 국민을 설득할 자신이 없으니 비겁하게 반론 및 정정보도 청구라는 법적 수단에 기대는 것 아닌가.

정부를 비롯한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일은 언론의 사명이자 존재 이유다.

“신문 없는 정부와 정부 없는 신문 중에 선택하라면 후자를 택하겠다”고 한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정부도 감시자가 없으면 안 된다. 그리고 신문의 자유가 보장되는 한 정부는 항상 감시자를 갖게 된다.”

신연수 경제부 차장 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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