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이해찬에 관한 추억

  • 입력 2006년 3월 15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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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追憶)이라는 말만큼 서정적인 단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신문에서 이해찬(李海瓚)이라는 이름을 볼 때마다 추억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니….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직후였던 것 같다. 필자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를 지켜보고 있었다. 민주당 이해찬 의원이 정부 관계자를 상대로 국가안전기획부 예산을 따지고 있는 중이었다. 정부 관계자는 시종 두루뭉술한 답변으로 넘어가려 했지만 이 의원은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결국 정부는 ‘안기부 예산의 총액 심사’를 받아들였다. 안기부 예산은 그 자체가 성역이었다. 그 성역을 깨고 비록 총액이나마 국회 예산결산 심사를 받도록 만든 것이다. 안기부에 대한 헌정 사상 최초의 문민통제 장치가 마련되는 순간이었다.

큰 뉴스였다. 회의장이 내려다보이는 기자실에서 그 장면을 보던 필자도 흥분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해찬 같은 국회의원이 10명만 있어도 나라가 제대로 되겠구나.’

정권이 바뀌고 이 의원은 김대중 정부의 교육부 장관이 됐다. 두어 번인가 점심을 함께했다. 이 장관은 교육 개혁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니 ‘교육부 개혁’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이런 말도 했다. 장관이 무슨 말을 해도 ‘노회한 교육부 관리들’이 겉으로만 듣는 척할 뿐 속으로는 딴 궁리만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는 간부들을 불러 모아 놓고 ‘극약 처방’을 썼다고 한다.

“당신들은 그냥 비만 피하면 된다며 내가 물러갈 때만 기다리는 모양인데 정 그러면 5년 내내 장관을 할 수도 있다. 내가 3선 의원 배지까지 던지고 교육부를 맡겠다고 하면 대통령이 안 받아 줄 것 같은가? 정말 5년 동안 내 밑에서 고생하고 싶은가?”

그날 이후 간부들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했다. 필자는 생각했다. ‘이런 장관이 2명만 더 있으면 나라가 제대로 되겠구나.’ 그러나 ‘이해찬 세대’라는 말과 함께 그의 교육부 장관 재임 시절은 난도질당했다.

다시 정권이 바뀌어 이 의원은 국무총리가 됐다. 많은 일이 있었고, 지금 이 순간은 불명예 퇴진을 앞두고 있다. 필자에게도 그의 이름은 이제 추억이 되고 말았다. 많은 사람의 기억에서 이해찬이라는 이름은 사라져 갈 것이다.

나는 그가 총리 자리뿐 아니라 이해찬이라는 이름까지 버리고 나왔으면 한다. ‘열두 편의 가슴시린 편지’라는 책에는 ‘청양 이 면장 집 셋째 아들’ 얘기가 나온다. 1991년 그가 ‘샘이 깊은 물’에 쓴 부친 얘기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주오(中央)대 법정학부를 나온 이 총리의 부친은 6·25전쟁이 나기까지 고향인 충남 청양에서 면장을 하셨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도쿄(東京)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거개가 서울에서 관직을 하나씩 차지했지만, 이 총리의 부친은 ‘사람이 없다’는 고향 사람들을 뿌리치지 못하고 시골 면장을 했다는 것이다. 신망이 두터워 6·25전쟁 때도 면민(面民)들이 나서 인민군에 당하는 것을 막아 줬다고 한다.

그가 이젠 이해찬 의원, 이해찬 장관, 이해찬 국무총리를 버리고 ‘청양 이 면장 집 셋째 아들’로 돌아가 봤으면 한다. 이해찬에 관한 추억이 안타깝다.

김창혁 국제부 차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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