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신우철]‘배심제’ 하려면 제대로 하라

  • 입력 2006년 3월 6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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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나라에서 칭송하고 부러워했으나 어느 나라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던 제도가 바로 배심제다.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 혜강 최한기는 지구전요(地球典要)에서 미국의 배심제를 일컬어 “추천으로 뽑힌 형관 6인이 평결하되 불공정할 경우 군중이 그를 폐한다”라고 했다. 개화기 한성순보 기사도 영국의 배심제를 소개하면서 “일본이 배심제를 세우지 않은 것이 서양 법률에 못 미치는 바”라고 했다.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안)이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에 의해 성안되어 국회의 의결을 기다리고 있다. 혜강이 1857년 배심제를 처음 소개한 지 150년 만의 일이니 우리 사법사에서 실로 기념비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일제 식민통치의 잔재인 ‘사법 관료주의’에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되기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바라 마지않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처럼 도입한 제도가 여러 결함 때문에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허울 좋은 ‘참여의 장식물’이 되어 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법안은 비록 ‘배심원’이란 명칭을 쓰고 있지만 미국식 배심제와 구별되는 이질적 방식을 채택했다. 배심원이 사실 판단(유무죄 결정)과 법률 판단(양형)에 모두 관여하되 그 평결은 구속력이 없는 ‘권고적 의견’에 그치도록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배심제가 헌법 제27조의 ‘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위헌 주장이 다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2012년의 제2단계 국민참여제를 준비하기 위한 시험적, 과도적 성격의 법안이라는 점도 ‘제도 부실공사’의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현재 법안대로라면 국민참여의 범위는 넓지만 그 평결을 관철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 결국 세금만 낭비하는 유명무실한 제도가 될 공산이 크다.

우리 헌법이 과연 미국식 배심제를 배척하는지는 의문이다. 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어디까지나 국민의 ‘권리’이므로, 형사피고인에게 배심재판을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하면 족할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의하면 재판청구권의 본질적 내용은 “법관에 의한 사실적 측면과 법률적 측면의 각 한 차례 심판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배심재판에 대한 항소심에서 직업 법관에 의한 사실 판단의 기회를 부여하거나, 배심재판 자체를 직업 법관의 재판에 대한 항소심으로 구성하면 될 것이다.

입법 기술을 통해 위헌 논란을 회피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재판청구권의 침해 혹은 제도의 과도기적 성격을 핑계로 실속 없는 ‘무늬만 배심제’를 도입한 것은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다. ‘배석하되 심판하지 않는(陪而不審)’ 들러리 배심원이라면 어느 국민이 시간과 비용을 희생하며 기꺼이 맡으려 하겠는가. 국민 수준 때문에 연습 기간이 5년씩이나 소요된다면 이는 주권자인 국민에 대한 모독이다. 우리 국민의 수준이 수백 년 전 영국 미국의 시민만도 못하단 말인가!

기실, 정부와 여당이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는 로스쿨 법안도 배심제 도입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말’로써 배심원을 설득할 필요가 없는 ‘서류’ 중심의 현재 우리 소송 구조에서 미국 로스쿨에서와 같은 소크라테스식 문답교육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더욱이 로스쿨 법안이 입학정원의 통제로 ‘소수의 가진 자’를 위한 특권교육으로 전락돼 가는 목전의 상황에서야!

헨리 8세에 맞서 법을 외친 토머스 모어의 짧은 목은 결국 잘리고 말았지만, 그가 꿈꾼 ‘법치의 유토피아’는 길이 후세에 전해졌다. 메이지 시대 사법 개혁의 기수로 활약했던 에토 신페이는 정쟁에 휘말려 효수라는 전근대적 악형을 받았지만, 그 이름만은 일본 사법 근대화의 선구자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이승만의 정적으로 대립했던 죽산 조봉암은 헌법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의 주장으로 삽입된 형사 절차상의 기본권 조항은 헌법 중 가장 긴 조문으로 남아 있다.

참여정부도 머지않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주권자 국민에게 ‘법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준 쾌거로 기억될 것인가, ‘개혁’이라는 당의정으로 법의 여신을 현혹한 악몽으로 기억될 것인가. 그 선택은 여전히 ‘법률가 대통령’의 손에 달려 있다.

신우철 중앙대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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