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손숙]가족의 의미 깨닫는 설

  • 입력 2006년 1월 2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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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철이 든 이후 아버지를 뵌 적이 거의 없다. 아버지는 늘 출타 중이셨고, 1년에 두세 번 바람처럼 다녀가실 때도 우리 삼남매에게는 거의 눈길 한번 주지 않으셨다. 그러던 어느 여름.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던가. 아버지는 생전 만난 적 없는 아이들 셋을 자동차에 태우고 나타나셨다. 내 동생 또래의 여자아이는 작은 분홍색 꽃무늬가 아름다운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그 밑의 두 남자아이는 앙증맞은 반바지에 체크무늬 셔츠를 차려입었다.

할머니는 나를 불러 “네 동생들이니까 방학 동안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내게는 어렵기만 하던 아버지에게 처음 보는 새 동생들은 “아빠, 아빠” 하면서 안기고 손을 잡아끌고 난리였다.

그해 여름방학 내내 나와 동생들은 그 아이들과 놀아 주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어머니는 그 아이들을 먹이느라고 늘 종종걸음을 치셨다. 그 이후로 해마다 방학 때만 되면 내 배다른 동생들은 시골로 왔고 생각 없던 아이들은 정이 들어 갔다. 몇 년 후에 아버지는 서울에서 하시던 사업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건너가셨고 그곳에서 또 형제를 두셨다고 한다.

그 복잡하고 어지러운 환경 속에서도 내 어머니는 꿋꿋하게 우리 삼남매를 다잡아 주셨다. 어린 우리가 방황하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정을 듬뿍 주셨고 때로는 서릿발같이 엄하게 대하셨다.

어머니의 유일한 염원은 우리의 교육이었다. 그래서 완고한 일가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겁도 없이 삼남매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시골의 생활비도 끊기고 누구 한 사람 도와줄 사람도 없는 서울에서 어머니는 우리를 먹이고 기죽지 않도록 학교에 보내셨다.

사춘기가 되면서 나는 어머니에게 무섭게 반발했다. 너무나 독특한 우리 집의 가족사, 엄하기만 한 어머니, 그리고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 형편이 늘 내 자존심에 생채기를 냈다. 그 모든 것이 모두 어머니의 탓인 양 나는 어머니에게 못되게 굴었다. 당신 인생을 송두리째 희생하고 당하고만 사는 어머니가 바보 같고 때로는 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왜 참고만 살아? 엄마는 속도 없어? 분하지도 않아? 지금 당장이라도 이혼하고 엄마 인생을 찾으란 말이야!”

내가 마구잡이로 대들면 어머니는 피식 웃으셨다.

“너희들 셋이 없었으면 엄마도 예전에 끝냈어. 무슨 미련이 있다고…. 하지만 어린 너희를 두고 엄마 인생만 찾아 떠나면 너희 인생은 뭐가 되겠니.”

이제 생각하면 우리 삼남매는 어머니가 당신의 인생을 몽땅 희생하셨기 때문에 온전한 사람으로 설 수 있었다. 백 번을, 천 번을 감사해도 모자랄 뿐이다. 이 같은 기억은 2000년 무대에 올린 연극 ‘어머니’에도 고스란히 투영됐다.

요즘은 세상이 변해서 그런지 이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혼을 하면서 자식을 서로 맡지 않겠다고 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심지어는 자식을 버리고 슬그머니 도망쳐 버리는 어미도 많다 보니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할머니 할아버지가 맡기도 한다. 이런 아이들은 세상에 대한 증오로 비뚤어지기 쉽다. 부모가 부모이기를 포기하고 어미가 자신의 행복을 찾아 자식을 버리는 세상을 우리는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가. 부모가 못 거두면 나라가, 세상이 그 아이들을 거두어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최근 에세이집 ‘사랑아 웃어라’를 통해 가슴 아픈 시절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일부에서는 내가 왜 이런 책을 냈는지 궁금해하고 있다 한다. 내일은 흩어졌던 가족이 다시 모이는 설날이다. 내 어린 시절 이야기가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면 분수 모르는 여배우의 생뚱맞은 과욕인가?

손숙 연극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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