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신우철]헌법학의 기본과 법무장관

  • 입력 2006년 1월 23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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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의 술자리 객설을 들추어낸다는 게 점잖은 일은 못 되리라. 굳이 거론하는 이유는 그 가운데 ‘헌법학의 기본’이란 말이 필자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무기대등의 원칙에 따라 필자도 소주잔 기울이며 몇 줄 적어 보기로 했다.

서양인들에게 헌법의 역사는 칼과 돈의 대립과 교환의 역사다. 우리가 숭상하는 서구 헌법학이란 정치=권력과 경제=권리의 ‘조화의 기술’을 기본으로 발전되어 온 것이다.

존 왕의 전쟁비용 조달에 지친 영국 봉건영주들은 폭주하는 왕의 칼날을 통제하기 위해 1215년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하도록 왕에게 강요했다. 우리 헌법 제12조에 수용된 적법절차 원리의 출발점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당시 누구도 농노가 이 권리의 주체인 ‘만인’에 포함된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런 문서가 있는 줄도 몰랐고, 더욱이 그것을 읽을 줄도 몰랐다(심지어 일부 영주들조차도 그랬다).

대표권은 안 주면서 세금만 거둬 가는 식민지 본국의 ‘몰상식’에 저항해 아메리카 13개 주 시민들은 독립전쟁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1787년의 미국 헌법은 정치적 대표의 원리와 경제적 과세의 원리를 결합시키는 ‘상식’을 최초로 성문화했다. 하지만 이 문서는 당시 성인남자 6분의 1 미만의 찬성만으로 발효되었으며, 게다가 흑인 인디언 여성 등은 헌법 규정의 ‘사람’ 축에 끼지도 못했다.

동양인들에게 헌법이란 서구 열강에 맞서 나라를 보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헌법으로 나라를 구하자는 ‘제헌구국론’이야말로 19세기 아시아 헌법학의 기본이었다.

만국공법에의 소박한 신뢰가 미국으로부터 배신당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법을 찾아 프로이센 제국의 공법교수 루돌프 그나이스트를 방문한다. ‘청동기를 도금하듯’ 헌법으로 나라꼴을 꾸미려 한다는 그나이스트의 냉소적 비유에 충격을 받은 이토는 귀국 후 헌법보다 ‘나라꼴’ 만드는 일에 진력하게 된다. 오늘날 일본의 헌법을 칭송하는 이는 적지만 그럼에도 일본은 누구로부터도 무시당하지 않는 나라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문헌법 대한국국제 9조는 ‘제헌구국론’의 한국판이라 할 만하다. 황제의 무한한 군권을 보장함으로써 나라를 구하겠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원인은 무엇일까. 이 대한국국제는 요한 블룬칠리의 국제법 교재 ‘공법회통’에서 조문의 대부분을 차용하고 있다. ‘대포 1문’보다도 못한 만국공법에 기대어 나라를 지켜 보겠다는 허망한 발상으로 헌법의 기본을 삼았던 것이 실패의 주 원인 아니었을까.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헌법학의 기본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 멀쩡한 헌법을 고쳐 번쩍번쩍 도금해 보이겠노라 법석을 떨기보다 나라꼴을 제대로 갖추는 데 진력하는 쪽이 헌법학의 기본에 더 가깝지 않을까. 성장과 분배로 ‘양극화’되고 냉전수구와 친북좌파로 ‘분단’된 우리의 이념지형을 가급적 조화롭게 타협시키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 헌법학이 기본으로 삼아야 할 과제가 아닐까.

흔히 ‘영국에는 헌법이 없다’고 한다. 성문헌법보다 더 강한 ‘신사들의 타협’으로 헌법의 기본을 형성해 온 역사 때문이다. 미국 헌법을 ‘위대한 타협’의 결과물이라 부르는 것도 헌법의 아버지들이 건국의 대의를 위해 서로 양보하는 지혜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영국과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할 수 있었던 것은 반대파 무쓰 무네미쓰의 재능을 아껴 영국 유학까지 보내 준 이토의 포용력 덕분이었다.

헌법학의 판단 결과는 국가권력의 작동을 일거에 무효로 만드는 힘을 지니기 때문에 헌법학자들이란 ‘소극적 태도’를 기본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이들 대부분이 ‘위헌’이라는 직설적 표현보다 ‘헌법과 조화되기 어렵다’거나 ‘위헌의 소지가 있다’는 식의 우회적 표현을 선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표현의 공백 속에는 정치인들로 하여금 ‘타협의 묘책’을 찾아가게 하려는 배려가 숨어 있다.

흔히 헌법이란 간단히 ‘국가의 기본법’이라 정의된다. 국가가 갖춰야 할 ‘기본 중의 기본’은 무엇일까.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무한한 신뢰만이 그 전부는 아닐 것이다. 국민의 소박한 나라꼴 걱정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포용의 기술’이 아쉽기만 하다.

신우철 영남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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