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용희]세상을 바꾼 ‘改名허용 판결’

  • 입력 2005년 11월 2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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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 하나를 내겠다. 자기 것이면서 남이 더 많이 쓰는 것은 무엇이게?

그렇다. 이름. 이름은 내 것이면서 남의 것이다. 이름은 타인에 의해 불려지는 것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김춘수의 유명한 시 ‘꽃’의 한 부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어야만 나의 정체성이 완성된다는 그것. 이름이 불려지기 전에는 존재의 본질적 의미를 가질 수 없는 미망의 단계라는 사실. 즉, 나의 존재는 다른 이가 이름을 불러 주는 것으로 세상에 등록되는 것이다. 세상과 나를 연결해 주는 탯줄 문자.

그러나 세상에 태어나 처음 듣게 되는 소리, 나를 불러 주는 누군가의 호명이 나를 ‘엽기적’으로 만드는 이름이라면….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됐던 텔레비전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는 이름 때문에 고통을 겪는 노처녀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전개됐다. 드라마에서 김삼순은 지적이고 분위기 있는 ‘김희진’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해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 이름은 그 언어적 규정력과 주술성을 가지고 상대를 하나의 결정적 이미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대법원은 최근 개명을 폭넓게 허용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개인의 이름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에 해당하기 때문에 개명을 허용한다”고 밝혔다. 이름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염두에 둔다면 개인의 인권을 찾아준 놀라운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임신중’ ‘지화자’ 등등의 이상한 이름 때문에 놀림을 당하고 그 고통 때문에 개명 허가가 쉬운 지방으로 수차례 이사를 다니는 웃지 못할 사례도 있을 정도다.

100년 전의 여성들은 온전한 이름조차 없었다. 족보에서 여성들은 성(姓)만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 무렵에 여성들은 ‘언년이’ ‘간난이’와 같이 폄훼의 뜻이 담긴 한글 이름으로 불려졌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여성의 이름은 남자 동생을 기약하기 위해 ‘귀남이’ ‘정남이’와 같이 남성 이름으로 변신해야 했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하층민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울 때 그 대가로 임금이 이름을 하사하곤 했다. 이름을 부여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비로소 자기의 존재와 인격, 인권을 독자적으로 보장받게 된다는 의미였다. 자신의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집단과 구별되어 자신의 개별적이고 고유한 역사가 시작된다는 큰 표시인 셈이다. 하여 사람들은 이름을 날리고, 이름을 얻고, 이름을 남기기 위해, 그 ‘이름’ 하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오죽하면 호랑이의 가죽과 구별되는 인간의 표시가 ‘이름’이었겠는가.

가수 하리수가 법원에 신청한 것은 성 결정권을 자기 스스로가 찾겠다는 의지였다. 하물며 내 이름을 내가 선택할 권리야 더 말할 나위가 있을까. 그런 점에서 이번 대법원 판결은 대한민국 법원이 생긴 이래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하는 진보적인 판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개명은 어렵다’는 오래된 고정관념을 단숨에 바꾸어 버린 개혁적인 판결이다. 사람들이 ‘개혁, 개혁’이라고 소리 높여 외치지만 바로 이러한 것이 ‘개혁’이 아닐까.

법은 억압과 규제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 받는 자의 눈물을 우선적으로 닦아 주어야 한다. 인권을 생각하는 법은 궁극적으로 ‘자유’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법원은 우리 주변에 이러한 억압이 더 없는지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오랜 관습 속에서 묵계로 받아들였던 억압적인 요소를 고쳐 나갈 때 비로소 ‘자유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판결 하나가 세상을 바꾼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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