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박원재/日 차기주자 2人의 ‘한류예찬’ 속내는

  • 입력 2005년 11월 16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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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차기 총리 후보 1순위로 꼽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장관이 관방 부장관 시절이던 2003년 8월.

기자와의 단독 인터뷰가 끝날 즈음 그는 “아내가 한국 드라마 ‘겨울소나타(겨울연가)’의 팬이 된 뒤로 한국어를 배우는 재미에 빠져 있다”며 “그래서인지 요즘은 내가 퇴근해도 알은척도 하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지역구인 시모노세키(下關)가 부산의 자매도시이고, 부관(釜關) 페리를 통해 두 도시의 왕래도 빈번하다”며 오랫동안 교분을 나눠 온 한국인 친구가 많다고 덧붙였다. 대북 강경파라는 세평에 걸맞게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도 한국과의 인연을 부각시키며 남북한 차별화를 시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포스트 고이즈미’의 또 다른 유력 후보인 아소 다로(麻生太郞) 외상도 요즘 한국에 대한 친근감을 표현하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하다. 11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그는 “용사마가 일본 중년 여성의 우상이라면 최지우 씨는 나 같은 남자들에게 인기가 높다”며 한류 팬을 자처하기도 했다.

이들의 ‘친한(親韓)성 발언’을 한국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의 ‘립 서비스’로 평가절하하고 싶지는 않다. 아소 외상이 언급한 대로 한류가 최근 몇 년간 일본 사회의 키워드로 자리 잡았고, 한국을 대하는 일본 사람들의 시각이 바뀐 것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평화헌법 개정 등 일본의 우경화를 주도한 매파 정치인이라는 점 외에도 여러모로 닮은 데가 많다. 일본 정계의 정치세습 관행이 낳은 2세 정치인이라는 점이 똑같고, 가문 내력상 한국과 유쾌하지 않은 인연을 갖고 있다는 점도 일치한다.

아베 장관의 외조부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이고 부친은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전 외상이다. 아소 외상은 일본의 전후 부흥 기반을 다진 명재상으로 평가받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총리의 외손자이며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전 총리의 사위이다.

배경을 중시하는 일본 정계에서 이쯤 되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혈통이다. 그래서 이들의 정치적 성공에 대해 경쟁자들은 ‘조상 잘 만난 덕’이라고 시샘하기도 한다.

기시 전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 아베 장관은 그런 외조부에 대해 “나에게는 위대한 존재”라고 되뇌어 왔다. 자신이 존경하는 외조부가 일본 제국주의 전쟁을 주도한 전범이라는 사실은 그의 정치 성향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로 작용했다.

아소 외상도 부친이 규슈(九州)에서 아소탄광을 운영하며 일제강점기에 많은 조선인 노동자의 징용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한국과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한 대학 교수는 대를 이어 정치를 세습하고 가문의 배경이 없으면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힘든 현재의 구도를 일본 민주주의의 위기로 진단했다.

모두들 이런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현실로 눈을 돌리면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아사히신문이 이달 초 실시한 ‘총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정치인’ 설문조사에서 아베 장관은 33%로 1위를 차지했고, 아소 외상은 5%로 2위였다.

아베 장관과 아소 외상에겐 일본 전후 정치 60년의 굴절과 영욕이 투영돼 있다. 두 사람의 의식 구조를 천착하다 보면 앞으로 일본 정치가 나아갈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싫든 좋든 일본과 부대끼며 살아야 할 처지라면 ‘아베-아소형’ 인물에 대한 연구를 이제라도 서둘러야 한다. 한국과 한류 열풍에 대한 이들의 진짜 속내까지 포함해….

박원재 도쿄 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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