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759년 佛혁명가 당통 출생

  • 입력 2005년 10월 26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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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디로 도망치라는 것이냐? 자유를 얻은 프랑스가 나를 내쫓는다면 갈 곳이 없다!”

프랑스 대혁명을 견인했던 당대의 웅변가 조르주 자크 당통.

그는 죽음 앞에서 꼿꼿했다. 투옥된 뒤 외국으로 피신하라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친 그는 단두대 앞에서 외쳤다. “내 머리를 시민들에게 보여 주시오. 내 죽음은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조국의 구원자’로 추앙받던 그의 죄목은 뇌물 수수와 반역이었다.

로베스피에르, 마라와 함께 혁명의회인 국민공회를 이끌었던 당통. 그는 자코뱅당의 우익인 ‘관용파’의 지도자였다. 당통은 혁명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애썼다. 그 한계를 긋고자 했다.

1793년 12월 1일, 그는 “급진주의자들의 역할은 끝났다”고 선언한다.

당통은 극단의 테러에 반대했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와 혁명정부의 모든 정책에 도전했고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들의 희망이 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혁명을 파괴하고 있다.”

당통에게 로베스피에르는 ‘위선자’였고 로베스피에르에게 당통은 ‘타락한 공화주의자’였다.

로베스피에르는 당통을 좌시할 수 없었다. 더는 혁명정부가 우파에 밀릴 수 없었다. “아직도 구체제의 허수아비 노릇을 하고 있는 자에게 재난을 내리소서!”

1789년 시작된 혁명은 1793년 들어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혁명은 피비린내를 맡으며 파행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반대파를 닥치는 대로 옥에 가두고 왕당파라는 의심이 들면 가차 없이 사형에 처했다. 그러나 이 열렬한 루소의 숭배자도 당통을 처형한 지 4개월이 못 되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으니….

영국의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은 신음을 토한다. “자유여, 너의 이름으로 무슨 죄가 저질러졌느냐?”

대중의 우상이던 당통. “혁명은 결백해야 한다”고 한 로베스피에르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면 그의 가슴은 뜨거웠다. 남성적이고 호방했다. “대담하게, 더 대담하게, 항상 대담하게!” 그게 그의 정치적 슬로건이었다.

그러나 그의 혁명적 열정도 점차 기력을 잃어 간 것인가. 당통은 왕족 같은 호사한 생활을 누리며 향락에 잠겨 갔다. 낭비벽이 심했고 독직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프랑스 역사가 조르주 르페브르는 말한다. “다스릴 수 없는 격정, 분별없는 부주의, 그리고 갑작스러운 포기…. 당통은 한마디로 다스려지지 않는 불덩이였다!”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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