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남진우]‘책속의 페로몬’에 취해 보시죠

  • 입력 2005년 10월 6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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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의 장편소설 ‘구토’엔 독학자라는 독특한 인물이 나온다. 그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습득한다는 거창한 목표를 세워 놓고 이를 위해 매일 시립도서관에 출근해 그곳의 책들을 알파벳 순서로 읽어 나간다.

어쩌면 성실하다거나 우직하다고 보아 줄 수도 있는 이 인물의 이런 행위에 대해 작가는 시종 풍자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는 바람직한 독자상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좋은 책과 보잘것없는 책에 대한 기초적인 구분도 할 줄 모르면서 공연히 무용한 일에 에너지를 소비하는 자기기만적 지식인의 한 부류로 그려지고 있다. 그의 근면한 책 읽기는, 먼 고장을 그리워하면서도 작은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처럼 어딘가 우스꽝스럽고 연민스러운 습관의 발로에 불과할 뿐이다.

책에 대한 열정을 제외한다면 사실 이 독학자라는 과장된 인물이 보여 주는 태도에서 긍정적 측면을 발견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아니 책에 대한 숭배의 감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서에 대한 오도된 인식을 보여 주는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지상의 모든 책을 다 읽겠다는 욕망은 그 자체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의 경우 ‘세상에 대한 지배욕의 왜곡된 표출’이라는 점에서 독서의 참다운 즐거움과는 상관없는 행위이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은 쓰러뜨려서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며 그걸 읽는 일은 일정한 기간 내에 끝마쳐야 할 공사가 아니다.

독서에 비유가 동원될 필요가 있다면 정복이나 돌파 같은 전투적 용어보다는 사랑이나 향유 같은 에로스적 용어를 적용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이 점을 망각하고 공리적 측면에서만 책 읽기를 바라보게 되면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엔 책과 더 멀어질 우려가 있다. 우리 사회에 아직도 책을 계몽의 도구로 여기는 엄숙주의적 풍조나, 독서와 공부와 입신출세를 일직선으로 연결해서 생각하는 타성이 남아 있는 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또 우리 사회에서 여러 매체와 기관을 통해 지속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독서에 관한 각종 캠페인 역시 그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책 읽기가 주는 즐거움의 측면에 대해 상대적으로 소홀한 편이다.

책은 왜 읽는가. 일차적으로 그것은 즐거움 때문이다. 정보 습득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영상시대, 인터넷시대에 책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이는 앞으로 더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독서가 주는 쾌감, 선형으로 이어진 문자의 나열을 따라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경험이 주는 기대와 흥분과 절정의 쾌감은 결코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흰 종이와 검은 글자가 뿜어내는 페로몬(동물이 분비하는 화학물질의 하나로 이성을 유혹하는 작용이 있다고 알려짐·편집자)에 취해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이 저자에서 저 작가로 건너뛰며 한 세계를 주유하는 것은 술이나 청룡열차 혹은 할리우드 영화가 줄 수 없는 그만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따라서 진정한 독서의 맛은 일정한 목표를 설정해 놓고 의무적으로 수행하는 과업형 독서에서가 아니라 한가로이 이 책 저 책 기웃거리며 거니는 산책형 독서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독서는 일상의 의무나 강박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의 나태와 자기 방기를 요구한다. 자신이 선택한 책이라도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 같은 것은 갖지 않는 것이 좋다. 읽다가 질리면 언제든지 내려놓고 다른 책의 속삭임에 귀를 열어 놓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직장인이라면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서점에 일단 들어가 보라. 학생이라면 친구나 연인을 만날 때 서점보다 더 좋은 약속 장소가 어디 있겠는가. 일단 그 안에 발을 들여놓아 보라. 역사 문학 철학 사회학에서 처세 요리 스포츠 광고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사방에서 그대를 유혹하며 달려오고 있지 않은가. 책은 그대의 손에 들려 그대의 상상력과 지식욕에 의해 부풀어 오를 때 비로소 충만한 존재가치를 획득한다. 한 권의 책을 수태할 수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그대인 것이다. 이 가을, 은은한 책의 페로몬에 취해 보자.

남진우 시인·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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