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활]현정은 회장의 선택

  • 입력 2005년 9월 27일 03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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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가슴에 슬픔을 안고 산다. 남편인 정몽헌 회장의 비극적 최후를 지켜봐야 했다. 자식을 둔 어머니로서 남에게 말 못할 아픔도 있다.

남편의 타계로 갑자기 경영을 떠맡은 회사도 여건이 좋지 않았다. 2년 전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했을 때 현대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각 계열사의 경영 상태는 최악이었다. 현대아산의 대북(對北) 사업은 ‘밑 빠진 독’처럼 그룹의 발목을 잡았다. 최근 현대상선 등의 경영 호전으로 한숨은 돌렸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현대를 침몰 위기까지 몰고 갔던 대북 사업은 특히 복마전(伏魔殿)이었다. 그룹 감사 결과 금강산 사업은 가신(家臣) 그룹의 좌장(座長) 격인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의 ‘개인 사업’으로 변질됐고 심각한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적발됐다. 북한과의 거래 과정에서 이런저런 의혹도 끊이지 않았다.

전문경영인이 회사나 주주보다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잘못된 선택을 하는 ‘대리인 문제(Agency Problem)’. 어느 기업이든 있을 수 있지만 현대는 유난히 심했다. 현 회장은 실태를 들여다본 뒤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달 중순 공개한 ‘국민 여러분께 올리는 글’에서 ‘일일이 언급하기도 싫은 올바르지 못한 비리(非理)’ ‘지위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취하는 경영인’으로까지 표현했다.

선택의 폭은 좁아 보였다. 대북 사업을 둘러싼 투명성 및 정경유착 논란은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꼬이고 뒤틀린 매듭을 명쾌하게 푸는 것이 말처럼 간단하지는 않다. 북한은 물론 남한 당국마저 은근히 김 부회장을 감싸면서 현대를 압박했다.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그리 겪지 않은 재벌가(家) 주부 출신 신참 경영자가 버티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현 회장은 원칙에 입각한 정공법을 택했다. 김 부회장 비리 의혹에 대한 감사 결과가 동아일보의 보도로 공론화되자 ‘대표이사직(職) 조기 박탈’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대북 사업을 ‘김윤규 복권(復權)’과 연계하려는 북한의 압박에도 “비굴한 이익보다 정직한 양심을 택하겠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현 회장의 정면 대응은 최고경영자(CEO)로서 아주 당연하다. 어느 기업 대주주나 총수가 ‘대리인 문제’에 휘말린 경영인을 무작정 끌어안고 가겠는가. 하지만 그동안 현대와 정부가 북한의 무리한 요구에 끌려간 일이 너무 잦았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남한의 기업인이나 정치인이 이런 강단(剛斷) 있는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있었느냐는 말까지 나왔다.

현대그룹에서 대북 사업이 차지하는 의미를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젠 남북한이 상호간의 정직한 신뢰를 바탕으로 정도(正道)와 원칙을 지키면서 ‘정상적 거래’로 돌려놓을 때다. 민간기업이 수익성을 무시하고 경제외적 환상에 매몰될 때 어떤 참담한 결과로 이어지는지는 그동안의 아픈 경험에서 충분히 배웠으리라 믿는다.

현 회장은 그룹 홈페이지에 이런 말을 올려놓았다. “순리(順理)에 역행하지 않으며, 생각은 차분하게, 행동은 과감하게 현대그룹을 이끌고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진정성’이 느껴진다. 이 마음을 앞으로도 잃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이 오랜 역사를 지닌 현대를 다시 제 궤도에 올려놓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권순활 경제부 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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