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남영]도청에 놀라고 장관 발언에 놀라고

  • 입력 2005년 8월 22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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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전기획부와 국가정보원의 도청 사건은 우리 사회를 또 한번 뒤흔들어 놓고 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민주화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사건이라 생각된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 도청의 최대 피해자는 아마도 당시 야권의 지도자였던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두 분이었으리라. 그러나 그 두 분이 권력을 손에 쥔 시절에도 국가정보기관의 도청 행위가 근절되지 않고 지속되어 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전 국민에게 배신감과 더불어 허탈감을 심어 주기에 충분하다. ‘나도 도청될 수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확산되어 가고 있는 것도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민감한 시점에 일부 장관이 국회에 나와 도청 문제에 대해 ‘희한한’ 논리를 펴 국민을 경악시켰다.

17일 윤광웅 국방부 장관은 국회 국방위에 참석해 국방장관 휴대전화에 대한 도청 대책을 묻는 국회의원의 질문에 “휴대전화로는 비밀사항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적인 대화만 한다”고 답했다. 휴대전화도 도청이 된다고 하는데 안보를 책임지는 국방장관이 보안장치가 안 된 일반 휴대전화를 쓰고 있다고 하니 국회의원으로선 당연히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대답이 이런 수준이었으니 이는 불성실할 뿐 아니라 도청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휴대전화 사용자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답변이었다.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은 두세 술 더 떴다. 그는 같은 날 국회에서 “국정원에서 만든 불법 감청 장비가 20대인 것을 고려하면 도청 대상인원은 기껏해야 1000명 정도”라고 답변했다. 그는 이어 “3700만 명에 달하는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방식 휴대전화 가입자와 1000명이 어떻게 같은가”라고 반문하면서 “국민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제가 아니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참으로 놀라운 발언이다. ‘기껏 1000명’에 대한 도청은 괜찮다는 것인가. 개인이나 소수자의 인권 보호 없이는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없다. 다수에 대한 인권 유린의 문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문제의 본질은 어떻게 국가정보기관 도청의 개연성을 차단하고 국민의 통신비밀 권리를 보장해 주느냐에 있다. 국회의원 질의에 대한 장관들의 답변은 의혹을 풀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두 장관의 답변은 문제를 키우는 쪽이었다. ‘불안하면 전화로 중요한 얘기를 안 하면 된다’, ‘기껏 1000명 도청할 텐데 뭐가 문제냐’는 발언은 저잣거리의 언쟁에서도 적절치 않은 수준 아닌가. 해당 장관의 기본적 소양을 의심케 한다.

아울러 이들 답변의 저변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가 깔려 있다고 본다. 장관들의 부적절하고 무책임한 답변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군부독재 시절 이후 비대해진 행정부가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를 경시하는 풍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회를 경시하는 것은 국민을 경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과 풍조가 참여정부 하에서도 계속된다는 것은 아직 우리 사회의 민주화 수준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장관들의 국회 답변은 보다 정확하고 세련되어야 한다. 질문의 핵심을 파악하여 본질을 왜곡하지 않고 문제해결 방향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회를 경시하는 풍조나 개인 및 소수를 무시하는 성향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장관들의 그러한 자기 변화는 한국의 민주주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이남영 숙명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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