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활]LG필립스LCD와 소버린

  • 입력 2005년 8월 20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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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필립스전자는 한국 축구팬에게도 친숙한 PSV 에인트호벤의 최대 주주다. 박지성과 이영표는 에인트호벤에서의 활약으로 세계무대에서 진가(眞價)를 인정받았다. ‘명예 한국 국민’ 히딩크는 이 팀의 감독이다.

경제 분야에서도 필립스는 한국과 인연이 깊다. 네덜란드 기업 가운데 대한(對韓) 투자가 가장 활발하다. 특히 LG그룹과 합작해 설립한 LG필립스LCD가 눈길을 끈다.

이 회사가 출범한 것은 1999년 9월. LG와 필립스가 절반씩 출자해 설립했다. 필립스의 투자액 16억 달러는 당시 한국에 들어온 단일 외자로는 최대 규모였다.

이어 ‘합작의 성공 신화’가 시작된다. 경북 구미공장에 4세대와 5세대, 6세대 액정표시장치(LCD) 생산라인이 잇따라 가동됐다. 내년 상반기에는 경기 파주시에 세계 최대 규모의 7세대 LCD 공장이 들어선다.

LG필립스LCD는 지난해 8조3281억 원 매출에 1조6554억 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하지만 설비투자를 위해 2001년부터 대주주에게는 배당을 하지 않았다. LG와 필립스는 상생(相生)의 협력을 통해 사업영역을 업그레이드하고 새로운 수익원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전체 경제에도 기여했다. LG필립스LCD의 작년 수출액은 7조5429억 원이었다. 직원은 현재 1만3000여 명, 파주 공장이 가동되면 더 늘어난다. 협력업체까지 감안하면 생산과 고용의 파급효과는 한층 커진다.

하지만 모든 외자 유치가 이렇지는 않다. 소버린자산운용의 SK㈜ 주식 매집으로 눈을 돌리면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소버린은 SK 경영권 분쟁에 뛰어들었다. 돈만 번다면 무엇이든 하는 단기 투기자본인 헤지펀드가 ‘기업 지배구조 개혁’을 들먹이는 자체가 코미디였다. 하지만 국내 대기업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일부 사회단체는 소버린을 편들었다.

소버린은 SK㈜ 주식을 사들인 지 2년 3개월 만인 올해 7월 주식을 모두 팔아 치웠다. 시세 차익과 배당금을 합해 8042억 원을 챙겼다. 환차익을 감안하면 9000억 원이 넘는다. 소버린의 전주(錢主)인 챈들러 형제는 올해 뉴질랜드의 최고 부자로 꼽혔다고 한다.

반면 SK는 경영권 방어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자연히 생산적 투자는 소홀했다. 소버린이 헤지펀드보다 국내 자본에 더 엄격한 한국의 정책 허점을 틈타 거액을 챙겨 빠진 뒤 우리 경제에 어떤 의미 있는 과실(果實)이 남았을까. 지배구조가 취약한 기업은 항상 외국 투기자본의 먹이가 될 수 있다는 교훈 외에는.

글로벌시대에 ‘자본의 국적’에 집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하지만 ‘자본과 투자의 성격’은 여전히 중요하지 않을까.

머니게임에만 몰두하는 헤지펀드와, 건실한 제조업체 및 우량 금융자본의 투자를 똑같이 평가할 수는 없다. 생산이나 고용 창출, 선진 노하우 전수 등 국민경제적 파급 효과가 큰 쪽이 훨씬 바람직하다. 투자와 투기의 경계가 애매하긴 하지만 분명히 차이는 있다.

경제현상의 판단 기준은 뭘까. 책상물림의 이론이나 이념, 자신만의 정의감이나 선입관은 아닐 것이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의 복리(福利)에 도움이 되느냐, 전체 국민경제에 어떤 득실(得失)을 미치느냐가 핵심이어야 한다. 외자 유치와 관련해 LG필립스LCD와 소버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권순활 경제부 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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