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효종]‘판도라 상자’가 말하는 것

  • 입력 2005년 7월 27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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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의한 도청 내용이 공개돼 일파만파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가히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과 같은 상황이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면 언제 닫힐 것인가, 어떻게 닫을 것인가, 또 누가 닫을 것인가. 혹시 잘못 닫아 ‘희망’만 갇히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도대체 판도라의 상자를 누가 열었느냐는 점이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제우스가 보낸 상자를 판도라가 궁금해서 열었다지만, 이번 상자는 누가 무슨 이유로 연 것인가.

우선 공개된 테이프에 의혹이 있다. 하고많은 도청 테이프가 있을 텐데 왜 하필 이번 것만 공개돼 논란의 대상이 됐을까. 강자로 군림해 온 재벌기업이 무너지는 통쾌한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작용했을까. 혹은 기득권 세력에 대한 적개심에 불을 붙이고자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음모가 진행되는 중일까. 특정 재벌기업이 정치과정에 개입하고 대선 후보를 선점하려고 했기 때문에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명망 있는 신문사 사주가 기업의 돈 심부름을 하고 여야를 넘나들며 훈수를 두고자 했기 때문에 X파일 소동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들의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필자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진짜 장본인으로 김영삼 정부를 지적하고 싶다. 정부의 불법 도청이 때 아닌 X파일 소동의 원인 제공자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 사태를 보면서 ‘정부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나 자신이 도청의 희생자’라며 큰소리치고 출범한 문민정부가 유력한 사람들의 사생활을 선별적으로 감시하고, 또 그런 자료를 정치공학적으로 이용했으니 얼마나 위선적인가.

정부가 공공의 이름으로 도청을 할 수는 있다. 유괴범 체포를 위해 합법적 절차를 거쳐 도청을 하는 것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공익 목적이 아니라 오로지 권력 유지와 극대화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정권 아부자와 정권 비판자를 가려 내는 데 사용한 것은 ‘공공(公共)의 적’이라 할 만큼 파렴치한 짓이다. 정부가 ‘빅 브러더’가 되고, 국민은 ‘팬옵티콘’, 즉 원형감옥에 갇힌 채 살아온 셈이 아닌가. 그런 정부에서 어떻게 민주화에 대한 진정성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퇴직한 안기부 직원들의 행태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공무 중 취득한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는 비밀’이 돼야 하는 것이 상식인데, 사적으로 몰래 들고 나와 8년이나 지난 시점에 유출한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늦게나마 불의를 고발하겠다는 정의감의 발로일까. 아니면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의 거래’처럼 또 다른 약삭빠른 사익(私益)의 추구일까. 앞으로 도청 테이프가 공개될 때마다 우리는 제2, 제3의 X파일 소동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생각해 보면 일부 기업과 일부 언론 및 정부가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특히 정부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공익정신이나 소명(召命) 의식은커녕 최소한의 직업윤리조차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서운 구석이 없고 또 자기 절제력이 없으니, 권력의 공고화(鞏固化)를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권력의 감시는 과거의 일이라지만, 지금 정부는 과연 도청에서 깨끗한가.

이제 판도라의 상자를 어떻게 닫을 것인가. 당장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이 사건을 과거사 규명이나 역사 바로 세우기의 한 사례로 보기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가꾸어 나가기 위한 어젠다(의제)로 봐야 한다는 점이다. 이 사태가 누구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 하는 정치적 계산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속물근성의 발로에 불과하다. 이참에 노기등등한 모습으로 ‘○○○ 죽이기’를 시도해서도 안 되며,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고 외쳐서도 안 된다. 그런가하면 “죄 없는 자만이 내게 돌을 던져라”라고 해서도 곤란하다. 그것은 모두 ‘오버’하는 짓이다. 우리 모두가 ‘네 탓’이라고 하지 않고 ‘내 탓’이라고 반성할 때 비로소 거듭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판도라의 상자를 닫고, 희망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박효종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정치학 parkp@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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