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고승철 칼럼]낙하산 CEO ‘마음은 콩밭’

  • 입력 2005년 6월 29일 03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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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출신의 어느 공기업 사장을 만났을 때다. 경영상황 몇 가지를 물어보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옆에 앉아 있던 임원들이 대신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묻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였다.

화제를 돌려 정치현안에 대해 질문했다. 그 사장은 금세 얼굴에 희색이 돌더니 신명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청와대에 언제 들어가 보고했다느니, 여권의 진짜 실세는 누구라느니….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그의 더듬이는 온통 권부(權府)에 쏠려 있었고 금배지를 달겠다는 야망은 여전한 듯했다. 자기가 맡은 기업은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도 공교롭게 그 공기업은 잘 굴러가고 있었다. 독점 사업을 벌이는 데다 경영환경이 괜찮은 덕분이었다.

잭 웰치 전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은 “고약한 리더가 이끄는 조직이 좋은 성과를 낼 때가 가장 고약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훌륭한 리더를 앉히면 훨씬 양호한 실적을 낼 텐데 무능한 리더가 흑자실적을 앞세워 쫓겨나지 않을 구실을 마련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 공기업 사장이 바로 이런 ‘고약한 리더’에 속하지 않을까. 공신(功臣)이라는 이유로 거대한 알짜 공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녹읍(祿邑)처럼 받았으니….

노무현 정부도 이제 집권 하반기에 접어들 무렵이어서인지 정권 협조자에 대한 빚 갚기에 서두르는 듯한 모습이다.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정치권 인사들이 공기업 CEO로 낙하산 타고 가는 모습이 너무 노골적이다. 그러면서도 적임자를 뽑았다고 우긴다.

특히 영남 지역에서 여당 국회의원 후보로 나섰다가 낙선한 정치인을 발탁하는 인사에 대해 “지역구도 극복을 실천하는 과정”이라 설명하니 교묘한 수사(修辭)에 머리가 어지럽다. 여당 낙선자들에 대한 배려 사례를 보고 야당 표밭에서 장렬히 ‘전사(戰死)’해도 손해 볼 것이 없다고 계산하는 ‘전사(戰士)’ 지망생들이 속출하지 않으랴.

CEO는 리더십과 전문성을 겸비해야 한다. 물론 전문성이 모자라더라도 전문지식을 갖춘 실무자들을 활용해 조직을 잘 이끄는 리더들이 적잖다. 미국의 컴퓨터회사 IBM은 부실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자회사 나비스코의 대표를 지낸 루이스 거스너 씨를 영입해 성공한 바 있다. ‘컴맹’인 거스너 회장은 소비자 욕구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혁신을 단행해 IBM을 살렸다.

‘낙하산 사장’이라 해서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전혀 다른 경험을 가진 외부인이 제시하는 혁신방안이 정답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내부에서 잔뼈가 굵은 책임자는 오랜 세월 정든 동료들을 겨냥한 구조조정 ‘칼춤’을 추기가 어렵다. 이런 면에서는 부실기업엔 외부 영입 CEO가 더 적임자일 수도 있다.

정치권 출신자의 공기업 사장 선임을 무턱대고 비판해서도 곤란하다. 그들도 기본 자질은 갖추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경영에 전념하지 않고 마음을 ‘콩밭’에 둔다는 점이다. 공기업 사장 직을 경력관리용 장식품쯤으로 생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회의원 또는 장관 배지를 달고 싶어 안달하는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틈만 나면 언론매체에 얼굴을 내밀려고 한다. 지역사회 주민들과 관련된 이벤트를 즐기며 지역 기관장 모임에 열심히 나간다. 아무리 피곤해도 카메라 앞에만 서면 펄펄 살아나는 신체 반응은 정치인 시절 그대로이다. 이런 과객(過客)형 CEO 아래에서는 임직원들도 업무에 전념하려 들지 않는다. 무사안일, 보신주의가 판을 치기 십상이다.

공기업은 아무나 맡아 적당히 경영해도 되는 조직이 아니다. 공기업 경영이 비효율적이면 국민경제에 엄청난 낭비가 생긴다. 이것도 치명적인 실정(失政)이다.

고승철 편집국부국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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