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한기흥]고이즈미와 야스쿠니

  • 입력 2005년 6월 13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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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한일정상회담의 성사 여부가 불확실한 것 같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교과서 왜곡,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등에 대한 양국의 시각차가 커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정부의 우려 때문인 듯하다.

이 중 독도와 교과서 문제는 조기 해결이 쉽지 않지만 야스쿠니신사 문제는 고이즈미 총리가 참배 중단을 결정할 경우 교착된 한일관계를 뚫는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결단을 기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2001년 4월 취임한 고이즈미 총리는 처음엔 과거사 문제를 진중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해 10월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방한했을 땐 곧바로 국립묘지와 서대문 독립공원(옛 서대문형무소 터)을 찾아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뜻을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 뒤 “고이즈미 총리는 상당히 진지한 반성과 사죄를 했다. 총리는 독립공원 등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고 했는데, 그분의 성품으로 봐서 진실을 말한 것이라고 믿는다”며 신뢰를 표시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2002년 3월 방한 때는 조용필, god, S.E.S의 가요 CD와 드라마 ‘겨울연가’의 사운드트랙을 자신의 신용카드로 직접 구입하는 등 한국문화에 대한 친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변했다. 최근 한국 중국의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보수 우경화의 길을 내닫는 그에게선 한일관계를 중시하는 듯했던 옛 모습을 더는 찾기 어렵다.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 등 생존해 있는 일본의 전직 총리 8명이 최근 ‘한국,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신중을 기해 달라’고 한목소리로 고이즈미 총리에게 촉구했지만 우이독경(牛耳讀經)에 그쳤다. 집권 4년을 넘겨 장수 총리가 된 데 따른 자신감이 고이즈미 총리를 뻣뻣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2002년 10월 중일 정상회담에서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이 야스쿠니신사 참배 중단을 요구하자 “신사 참배는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결의를 하고, 과거의 잘못을 반성함과 동시에 미래를 바라보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몇 년 전 기자가 가 보았던 야스쿠니신사는 결코 군국주의 시절을 참회하는 사람이 갈 만한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군국주의를 그리는 사람들의 ‘해방구’ 같았다. 그런 곳에서 부전(不戰) 결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1970년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유대인 희생자 기념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한 것과 같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를 일본 총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일본 지도자의 역사 인식이 35년 전 독일 지도자의 수준에 아직 못 미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마침 정치적 영향력이 큰 일본유족회가 11일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해 “인근 국가를 고려하고, 배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고이즈미 총리로선 퇴로를 얻은 셈이다.

차제에 고이즈미 총리가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차원에서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중단해 일본의 양심이 살아 있음을 보여 줬으면 좋겠다.

한기흥 정치부 차장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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