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11년 천주교 대구교구 탄생

  • 입력 2005년 4월 7일 18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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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강제합방 이듬해인 1911년 4월 8일, 천주교 조선교구가 서울, 대구 두 교구로 분리됐다.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관할구역이 넓고 신자도 크게 늘어 교구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교황 비오 10세는 이를 허락해 대구교구를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대구교구는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을 포괄했다.

한일강제합방은 병인박해라는 시련에서 겨우 벗어난 한국 천주교회에 또 다른 수난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천주교회는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신자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특용작물의 재배기술을 도입 보급시키는 등 생활 속 포교를 정착시켜 매년 3%씩 꾸준한 신도수의 증가를 이뤄냈다.

대구교구의 탄생은 일제강점기 천주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는 사건이었다. 신자는 모두 2만6000여 명으로 당시 한국교회 전체 신자 7만6000여 명의 3분의 1에 해당했다. 초대 교구장에는 파리 가톨릭대와 소르본대 철학과를 수료한 엘리트 선교사 드망즈 신부였다.

한국 천주교는 애초에 신앙이 아닌 신사상(新思想)으로 자생적으로 탄생해 세계교회사에서도 특이한 사례로 꼽힌다. 성리학에 회의를 품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은 새로운 시대에 대안이 될 수 있는 사상 체계로 천주교를 선택했고, 중국 유교 철학의 원초적 개념이었던 천(天), 상제(上帝)의 개념을 천주교 신앙의 기반으로 삼았다. 여기에 천주교회의 평등사상은 조선왕조의 불평등한 신분제를 개혁하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사고의 일대전환을 가져왔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는 19개 교구에 이른다. 이 같은 천주교의 급격한 성장은 1984년과 1989년 두 차례에 걸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에 힘입은 바 크다. 그의 방한 이후 신자수가 184만 명에서 450만 명으로 급증했기 때문이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소외의 땅 소록도를 방문한 고인의 행보는 천주교 신앙의 진정한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이 아닌 몸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신앙도 결국 추상적인 신념이 아니라 사람과 지도자에 의한 것임을 교황은 몸소 보여준 것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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