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임채청 칼럼]미심쩍은 ‘여의도의 봄’

  • 입력 2005년 3월 1일 18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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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경술국치 열흘 전 한 중신의 어전회의 발언이 조야의 분분한 논란을 낳았다. 한일강제합방에 대해 그가 내놓은 ‘불가불가(不可不可)’라는 의견이 띄어 읽기에 따라 반대하고 또 반대한다는 뜻의 ‘불가 불가’도 되고 어쩔 수 없이 찬성한다는 뜻의 ‘불가불 가’도 되기 때문이었다. 훗날 그의 행적은 그게 결국 ‘불가불 가’였음을 보여줬지만.

다시 맞는 3·1절에도 안팎으로 ‘불가불가해서’ 종잡을 수 없는 일이 많다. 한일 양국 정상이 합의한 ‘한일우정의 해’ 벽두에 주한 일본대사가 서울 한복판에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망언을 한 것도 그렇고, 6자회담 무기한 불참과 조건부 참가를 오락가락하는 북한의 태도도 그렇다. 잇단 경기회복 전망 역시 이를 체감하지 못하는 서민들로선 변덕스러운 봄 날씨처럼 미심쩍을 수밖에 없다.

▼변화에 진정성이 있을까▼

그런 점에 있어서는 한국정치를 따를 만한 것이 없다.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는 언론을 사납게 공격하곤 했던 조기숙 씨가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에 취임하면서 “(그것은) 한 교수의 개인 의견이고…”라고 한 것부터가 씁쓸하다. 이전에 그가 남을 비판할 때는 자신의 경우처럼 개인적인 사정까지 고려하지는 않았던 듯해서다.

누구보다 개혁의 서슬이 시퍼렇던 여당의 김희선 의원이 갖가지 금품수수 혐의로 검찰의 수사대상에 오른 것은 배신감마저 안겨준다. 번지르르한 허울에 또 속은 게 아니었는지 하는 의심을 떨치기 힘들다.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소양을 충분히 쌓았을 법한 이해찬(5선 의원) 국무총리의 고압적인 국회 답변은 성격 탓만은 아닌 것 같다.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그의 ‘무례’는 현 여야구도의 구조적인 불균형에 터 잡고 있는 측면이 있다.

지난달 25일의 보기 드물게 ‘목가적인’ 의사당 풍경도 이 같은 관점에서 재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 국정연설을 하는 동안 야당 의석에서도 박수가 이어지고 야당 의원의 칭찬에 대통령이 답례까지 했다고 해서 여의도에 봄이 찾아왔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변화의 진정성을 확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선 대통령이 달라졌는지에 대해 여권 내부의 시각조차 엇갈린다. 오히려 회의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대통령의 세계관이나 철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보는 여권 인사들이 더 많은 것이다. 대통령 자신이 “(내가) 변했다고 하는데 나는 억울하지만 변했든 안 변했든 잘해봅시다”고 말한 적도 있다.

청와대 사람들은 흔히 대통령이 바뀌었다기보다는 정치 환경이 바뀌었다고 본다. 총선 승리로 여당이 원내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대통령의 조급증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여의도의 봄’을 반기기가 망설여지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 환경이란 언제나 유동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직은 바깥바람이 차다▼

우려되는 조짐도 있다. 한동안 정치 얘기를 자제하던 대통령이 취임 2주년 국정연설에서 선거구제 같은 민감한 사안을 다시 언급한 것에서 오싹 한기를 느낀다. 차기 총선까지 3년여나 남아 있는 지금 그것은 그리 시급한 문제가 아닐 텐데 왜 그랬는지 궁금하다. 4월 재·보선이 머지않다는 게 자꾸 떠오른다.

부드러워진 대통령의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여전히 굳어 있는 실세 총리의 표정도 마음에 걸린다. 그 중 어느 것이 여권의 저류를 반영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여권 내의 두 갈래 기류가 암묵적으로 역할을 분담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여당의 당권 경쟁 레이스도 대체로 ‘개혁 대 실용’의 두 갈래로 가닥이 잡히고 있다. 아직은 여의도의 바깥바람이 차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계절이다.

임채청 편집국 부국장 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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