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67>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1월 25일 18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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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저게 어디 군사냐? 설마 초나라 군사가 벌써 따라붙은 것은 아니겠지?”

한왕 유방이 은근히 걱정스럽다는 눈길로 달려오는 인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주가가 몇 기(騎)를 이끌고 말 배를 박차 달려 나가며 소리쳤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다가오는 인마를 향해 달려가는 주가의 움직임이었다. 금방이라도 적의 선봉을 찔러 넘길 것처럼 창을 꼬나들고 달리던 그가 움찔하더니 곧 창끝을 늘어뜨리고 다가오는 적장을 얼싸 안았다. 이어 주가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한왕 쪽으로 달려오는 적장은 멀리서 보기에도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번쾌로구나. 번쾌가 왔다!”

이윽고 다가오는 장수를 알아본 한왕이 그렇게 소리치며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오래잖아 번쾌도 한왕 앞으로 달려와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형님! 대왕….”

번쾌가 땅바닥에 몸을 내던지듯 엎드려 한왕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울먹였다. 그런 번쾌의 길게 고리진 두 눈에는 정말로 눈물이 번쩍였다. 한왕도 눈물이 글썽였다. 그러나 슬픔이나 괴로움을 과장되게 펼쳐 보이는 재주는 한왕의 몫이 아니었다. 한왕이 곧 얼굴에서 어둡고 무거운 그늘을 걷어내며 웃음기 섞어 말했다.

“이놈. 만약 네놈이 죽었다면 나는 무덤을 파헤쳐서라도 네놈에게 나보다 먼저 죽은 죄를 물으려 했다. 네놈이 잘못되면 내 무슨 낯으로 처제를 본단 말이냐? 저 억센 여치(呂雉=呂后)의 구박은 또 어찌 견딘단 말이냐?”

그러다가 문득 여후와 태공 내외가 항왕에게 잡혀간 일을 떠올렸는지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걱정이나 절망의 표정도 역시 한왕에게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이내 태평스러운 표정을 되살린 한왕이 아직도 감격에 겨워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고 있는 번쾌에게 물었다.

“호릉(胡陵)의 낭패는 과인도 전해 들었다만, 그 뒤 보름은 어찌된 것이냐? 어찌하여 호릉에서 1500리도 넘는 여기까지 오게 되었느냐?”

그제야 번쾌가 감정을 가다듬어 양(梁) 땅으로 흘러들어 오게 된 경위를 말했다.

“호릉에서 갑작스러운 항왕의 야습을 받고 밤새 쫓기다가 날이 밝은 뒤 선보(單父)에서 패군을 수습해 보니 3만 대군이 겨우 3000을 채우기 어렵게 줄어 있었습니다. 신은 그 군사로도 팽성으로 달려가는 항왕을 뒤쫓으려 하였으나, 워낙 군사가 적은 데다 다시 제나라에서 돌아오는 초나라 대군이 뒤따르고 있어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황급히 서쪽으로 빠져나오는데, 벌써 외황과 고양(高陽) 옹구가 모두 우리에게 항복했다 변심한 제후들이나 초나라 장수들에게 떨어져 작은 군사로는 지나가기도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신은 그동안에도 흩어진 한군(漢軍)을 모으며 군세를 키우다가 양(梁) 땅에 이르러 팽월의 패군을 수습하고 나서야 겨우 1만 군을 거느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번쾌가 거기까지 얘기하자 팽월의 이름을 들은 한왕이 갑자기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며 물었다.

“팽월의 패군이라니?”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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