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095년 십자군 출정

  • 입력 2004년 11월 26일 18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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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대테러전쟁에 대해 ‘오늘날의 십자군(crusade) 전쟁’이라고 의미를 부여하자 그의 보좌진에서는 난리가 났다. “단순한 말실수일 뿐입니다.” 아랍 세계는 ‘그 말 새겨두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왜 ‘십자군’이란 한마디에 그토록 민감한 것일까.

1095년 11월 27일 프랑스의 작은 마을 클레르몽.

3000여명에 이르는 가톨릭 성직자들이 모인 곳에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나타났다.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은 기독교 세계의 불명예입니다. 신자들끼리 싸우던 창을 돌려 성지(聖地)를 회복하는 데 힘을 합쳐야 합니다.”

교황의 말은 낭랑했다. “목숨을 잃는 자는 천국에서 보상 받을 것입니다.”

웅성대는 청중 앞에서 그는 한마디를 더 보탰다.

“동방에는 금은과 수많은 보물이 깔려 있다고 합니다.”

청중은 소리 높여 외쳤다. “하느님, 가게 해 주옵소서.”

이어지는 회의에서는 참전 군인들의 모든 죄를 사면해 주고 3년 동안 그 재산을 교회가 보호해 줄 것 등이 결정됐다.

십자군 결성의 직접적 계기는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교황청에 보낸 원조 요청이었다. 638년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수중에 들어갔다. 11세기 중엽 셀주크튀르크가 기독교인의 예루살렘 순례를 금하자 비잔틴은 튀르크를 공격했지만 번번이 패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로서는 교황권의 위세를 높이고 비잔틴 교회를 가톨릭에 통합할 호기였다.

3년7개월 뒤인 1099년 6월, 십자군은 예루살렘의 성벽 앞에 도달했다. 6주나 계속된 전투 끝에 십자군은 성을 함락했다. 무슬림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육했다.

성공은 잠시였다. 전열을 정비한 이슬람 세력은 1187년 예루살렘을 재탈환했다. 거듭 파병된 십자군은 차츰 노략질에 눈이 어두워졌다. 어린이와 청소년들로 구성된 ‘소년 십자군’이 노예로 팔려가는 비극도 벌어졌다. 1291년 기독교 세계는 십자군 운동에서 완전히 물러섰다.

그 후에도 기독교 세계에서 ‘십자군’이란 ‘성스러운 군대’라는 의미로 남았다. 그러나 같은 단어가 이슬람 세계에서는 ‘악마의 군대’와 같은 뜻으로 전해져 온 것이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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