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엘리아 카잔 출생

  • 입력 2004년 9월 6일 18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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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검은 뱀이었다. 허물을 벗으며 몇 개의 인생(人生)을 살았다!”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태어난 그리스인’ 엘리아 카잔.

그는 할리우드의 거장(巨匠)이었다. 마술사 같은 연출자였다. 리얼리즘 영화의 대부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예술적 성취는 1952년 4월 그 충격적인 ‘탈피(脫皮)’로 일순 빛이 바랬다.

때는 매카시 선풍이 휘몰아치던 잿빛 시절이었다.

미 의회의 ‘반미행위조사위원회’에 선 카잔은 자신이 1930년대 중반 공산당에 적을 두었음을 고백했다. 그리고 공산당원인 동료 8명을 고발한다. 뉴욕타임스에는 “할리우드에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라”는 글을 실었다.

카잔의 증언이 있던 바로 그 해에 ‘20세기의 영화를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은’ 찰리 채플린이 미국에서 추방된다. ‘어린이의 눈을 가진 거인’ 오슨 웰스도 이때 희생됐다.

그러나 그의 ‘밀고(密告)의 변’은 간명했다. “공산당 동료를 보호하겠다고 내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카잔은 이때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과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무대에 올렸고 영화 ‘신사협정’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수많은 영화인들이 매카시즘의 칼날에 스러질 때 그는 걸작들을 쏟아냈다. ‘워터 프런트’(1954년) ‘에덴의 동쪽’(1955년) ‘초원의 빛’(1961년)….

카잔은 시대의 ‘왼쪽’을 사납게 할퀴었던 광풍이 잦아든 뒤에도 자신의 행위를 사과하지 않았다. 1988년 출간된 회고록에서도 그는 주장했다. “다시 그런 기회가 오더라도 똑같이 명예로운 행동을 하겠다.”

그러나 할리우드는 잊지 않고 있었다.

1999년 아카데미가 그에게 공로상을 수상했을 때 청중의 절반은 기립박수를 ‘보이콧’했다. 침묵의 야유를 보냈다. “그 어떤 위대한 예술적 공로도 비신사적인 행위를 덮을 수는 없다!”(닉 놀테)

카잔의 말년은 쓸쓸했다. 냉랭한 고독(孤獨) 속에 묻힌다.

그는 숨지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울적한 장례식은 원치 않는다. 파티를 열어 오래된 적(敵)들을 초대하라….”

그러나 그는 수많은 적대자들보다 오래 살았으니 그의 나이 94세였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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