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저녁답

  • 입력 2004년 7월 30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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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답

정수자

손수레 바투 쥐고 숨 고르던 할머니

잠시 한눈 판 동안 깜짝 켜진 초록에

한 생이 다 지나갈 듯 허위허위 내닫는다

굽은 허리 한껏 펴고 길을 당겨 보지만

패 한 번 못 잡고 허둥거린 일생처럼

반 넘어 가기도 전에 신호를 또 놓친다

하지만 지는 해가 산맥은 못 넘으랴

밀려오는 차들을 점호하듯 세워둔 채

느긋이 길을 건넌다, 광배 같은 노을길을

―시집 ‘저녁의 뒷모습’(고요아침) 중에서

가만, 내 노모(老母)를 대한 듯 허둥거리는 그 할머니의 모습이 초라하고, 안쓰럽고, 가슴 아릿해 외면하고 싶었는데, 시는 끝까지 읽을 일이로세. 그 허둥거림이 단번에 저리도 느긋하고, 의젓하며, 광휘로운 행보로 바뀔 줄 몰랐다네.

‘지는 해가 산맥을 못 넘으랴.’ 과연 가파른 산맥을 넘는 것은 모두 지는 해요, 십만명 화공을 불러도 다 칠하지 못할 황금빛 광배를 어깨 너머로 거느리는 것도 지는 핼세그려. 생의 마지막이 저리도 위엄 있거늘, 저것은 분명 퇴장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의 행차가 분명하네. 예서 지는 해가, 제서 새로 뜨는 아침 해가 아니겠나? 그러니 저 아침노을은 칠흑 어둠도 다 지우지 못한 지난 저녁의 광배일세.

‘늙음’이 저리도 찬란한 줄 예서 보았네. 저 할머니 녹슨 손수레도 황금빛 옥좌로 변하셨어. 이제 가시는 길마다 초록불일세.

반 칠 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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