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나의 피투성이 연인’…진실의 내면에 깃든 고통

  • 입력 2004년 7월 2일 17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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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피투성이 연인/정미경 지음/244쪽 민음사 8500원

정미경의 첫 소설집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여섯 편의 중·단편을 담고 있다. 이 소설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그 간극의 고통을 예민하게 느끼는 자의 내면 풍경이다. 정미경의 미덕은 간극의 고통에 대해 서투르게 분노하지 않는 데에 있다.

서투른 분노가 표출되는 까닭은 작가가 자신과 작품간의 거리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품이 작가의 주관성에 의해 훼손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거리 확보의 실패에 따른 필연적 결과다. 거리 확보는 작가의 냉철함에서 나온다. 정미경은 냉철한 작가다.

‘나릿빛 사진의 추억’이 보여주는 것은 진실의 하찮음이다. 진실이 하찮아짐으로써 벌어지는 사건들이 우울하게 펼쳐지고 있다. ‘호텔 유로, 1203’의 주인공은 명품 쇼핑 중독자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이 기형적 인간의 내면 묘사에서 작가의 시선은 삶의 가혹한 슬픔에 집중돼 있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아름다운 연인’에서 ‘피의 냄새와 잔혹함, 배신과 후회로 얼룩진 연인’으로 변해가는 한 여인의 고통을 손에 잡힐 듯이 보여준다. ‘성스러운 봄’은 죽어가는 어린 딸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한 남자를 통해 삶 혹은 운명의 고통스러움을 조각하고 있으며, ‘비소 여인’은 사랑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살인 중독’을 음화처럼 그리고 있다.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는 ‘스스로 빛나지 못하는 차가운 검은 덩어리’로서의 생명과 ‘진실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비추는 생명’의 차이를 아프게 드러낸다.

정미경의 소설은 잘 읽힌다. 잘 읽히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요구되지만 그중의 하나가 플롯의 미학이다. 플롯에 있어서 시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다. 똑같은 이야기라도 시간 배열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훌륭한 소설이 되기도 하고, 남루한 소설이 되기도 한다. 소설이 잘 읽힌다는 것은 시간이 매끄럽게 배열되어 있다는 뜻이다. 시간을 서투르게 배열하면 서투른 소설이 된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첫 창작집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능숙하게 배열되어 있다. 다만 현재시제와 과거시제의 불규칙한 혼합이 마음에 걸린다. ‘이다’와 ‘였다’의 차이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정미경의 문장은 대단히 조심스럽다. 그의 언어가 조각하는 삶의 문양은 조심스러움이라는 막(膜)에 싸여 있다. 나의 눈에는 그의 조심스러움이 성실의 산물로 보인다. 이 지점에서 정미경의 행로가 읽힌다. 막이 투명할수록 막에 싸인 사물이 투명해진다. 정미경의 과제가 조심스러움이라는 막을 보다 투명하게 하는 일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정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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