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연애소설(宴哀疎說)’…연애의 ‘체위’

  • 입력 2004년 6월 18일 17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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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宴哀疎說)/김미현 엮음/385쪽 1만2000원 글빛

‘스물한 편의 연애편지’, ‘연애의 증거’, ‘사랑아, 나를 몰아 어디로 가려느냐’ 등으로 구성된 ‘사랑의 글모음’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연애를 다룬 작품들을 모은 독특한 선집이다.

이 책은 지극히 매력적인 주제에 근거함으로써 ‘나혜석에서 김영하까지’ 시대를 포괄할 뿐만 아니라 소설 이외의 연애담론들까지 묶을 수 있었다. 이러한 체제는 ‘연애의 시대’ 등 최근의 문학연구 경향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는 사랑을 둘러싼 일상과 풍속을 미시사적으로 관찰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물론 수록된 작품들을 ‘연애’로 묶는 것에 회의가 들 수 있다. 독자의 자유롭고 폭넓은 작품 감상을 오히려 방해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독서의 포인트는, ‘러브(love)’의 번역어인 ‘연애’라는 말이 출현한 이후 다양하게 변주되어 온 문화사적 현상과 맥락을 고려하는 일이다. 즉 이 책은 근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성립된 연애의 풍속적, 문학사적 계보를 염두에 두고 있다. “원체 사랑이란 것은 있는 것이 아니어든. 누구의 사랑-그도 어느 때 누구에게 대한 사랑이란 것이 있지. 사랑 그 물건이란 것은 없단 말야”라고 한 이광수의 말로 이 책이 시작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엮은이(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는, 죽음에 이르는 낭만적인 사랑(나도향 ‘벙어리 삼룡이’), 신여성의 도전과 좌절로서의 사랑(나혜석 ‘이혼고백장’), 모던보이의 목숨을 건 퇴폐(이상 ‘봉별기’), 의붓아버지 아들과의 애틋하고도 운명적 사랑(강신재 ‘젊은 느티나무’), 희생과 인내로 점철된 여성의 사랑(서영은 ‘먼 그대’), 성장의 통과의례로 기억되는 사랑(이인화 ‘초원을 걷는 남자’), 절망과 희망의 두 얼굴을 지닌 채 초조하게 내연(內燃)하는 사랑(윤영수 ‘사랑하라, 희망 없이’), 인연과 종교적 개안으로 승화되는 사랑(윤대녕 ‘상춘곡’), 타인을 확인하고 경영(經營)하며 자해와 달콤한 몰락을 긍정하는 냉소적인 사랑(은희경 ‘타인에게 말걸기’, 배수아 ‘여점원 아니디아의 짧고 고독한 생애’), 더 나아가 사랑을 컴퓨터 바이러스의 감염에 비유하는 디지털 러브의 논의(김영하 ‘사랑이란 이름의 버그’) 등등을 제시한다. 이것이 선집을 엮은이가 “직접 만져 보도록 만들고 싶었던” 연애의 ‘단면’들이다. “사랑은 접촉(Love is touch)”이란 존 레넌의 가사를 염두에 둔다면 이 책 자체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독자에게 연애를 건 셈이다.

요컨대 사랑은 존재가 아닌 관계의 별칭이다. 따라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옆구리가 허전할 수밖에 없다. 이를 일러 편자는 ‘연애의 체위’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기쁨(宴), 슬픔(哀), 소외(疎), 담론(說) 등의 네 가지 체위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또 이들 체위는 여러 가지 자세로 응용되기도 할 터이다. 사랑은 기쁘고도 슬프며 충족될수록 외로울 뿐 아니라, 말로는 곤란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애소설(演曖沼泄)’을 쓰거나 ‘연애소동(燕埃訴動)’을 벌일 수도 있다. 물론 한 가지 체위만으로도 헐떡거리는 경우가 많겠지만 말이다.

이경훈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부교수 lkhors@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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