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쇼쇼쇼-김추자…’ 희미한 옛 흔적의 그림자

  • 입력 2004년 6월 18일 17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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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쇼쇼-김추자, 선데이 서울 게다가 긴급조치/이성욱 지음/300쪽 1만8000원 생각의 나무

마흔 둘 젊은 나이로 2002년 세상을 떠난 70년대 키드, 전방위 문화평론가 이성욱이 마음먹고 기록했던 70년대 흔적들이 이 책 속에 담겼다. 이미 명멸한 것들에 대한 추억담이지만, 그 속에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 삼키던’ 그때 그 시절 우리들의 모습이 영사된다. 언제 이 모든 것들을 다 기록해 놓았을까 하는 찬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디테일이 훌륭한 저자의 기억들은 오래된 LP판이 들려주는 듯한 마음의 안정과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저자는 70년대 대중문화의 아이콘들을 영화, 대중가요, 섹슈얼리티, 스포츠, 춤으로 나눈 뒤 자신의 경험과 추억을 풍경처럼 펼쳐 보인다. 영화를 다룬 1장 ‘서면로터리 북성극장에서 영화를 보다’는 박노식, 장동휘, 숀 코널리, 찰슨 브론슨, 이소룡이 나오던 그 시절 유행 영화들을 옛날 포스터들과 함께 파노라마로 소개한다. 극장 화장실의 낙서를 추억하는 대목에선 실소가 터져 나온다.

‘내 마음의 요람이 되어 버린 김추자’(2장)는 70년대에 꽃 피웠던 대중가요 회고담이다. ‘터질 듯한 엉덩이와 허벅지를 감싸다가 발목 밑에서 갑자기 풀어지는 나팔바지. 비음을 섞은 음색에 시옷 발음을 쌍시옷으로, ‘자’ 발음을 ‘좌’로 하는 김추자의 노래는 어린 내가 들어도 섹시하기 짝이 없었다.’

김추자에 이어지는 신중현과 어니언스, 대학가요제 회고담이 남성보컬그룹 ‘키보이스’를 ‘열쇠 소년들’로 바꾼 국어사랑운동, 가사 검열, 금지곡 처분, 대마초 사냥 이야기들로 이어지면 씁쓸한 추억으로 변한다.

3장은 70년대 스포츠문화 회고다. 고무공 게임 ‘짬뽕’의 추억, 한 옥타브 높은 이광재 아나운서의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여기는 서울운동장입니다’ 같은 들뜬 목소리, 70년 멕시코 월드컵의 화려함, 홍수환 유제두 알리로 대표되는 복싱 열기, 서영무 감독과 황규봉 투수가 엮어 낸 화려한 경북고 신화 등 고교야구 이야기가 망라된다.

4장 ‘선데이 서울의 색기 발랄함에 빠지다’는 이 책의 압권. ‘여성중앙’ 중간에 밀봉되었던 ‘성의 비밀’ 페이지, 팽팽한 가슴을 컬러로 보여주던 ‘선데이 서울’ 화보와 끈적끈적한 기사들, 한국의 모든 성 문제를 다 해결하는 일급 해결사였던 산부인과 전문의 한국남의 라디오 프로그램 등 70년대 섹슈얼리티 단상들이 ‘성의 분무시대’라 할 요즘과 겹쳐지면서 웃음을 자아낸다.

마지막 5장 ‘남포동 대연각, 걸(乞)춤의 추억들’은 저자의 춤바람 이야기이다. ‘야전’(야외전축)을 사 들고 친구 집을 전전하며 몸을 놓아 버린 일, 부산시내 ‘고삐리’들이 남포동 대연각에서 존 트래볼타의 디스코를 흉내 내던 일, 공짜 춤을 추기 위해 ‘친구 만나러 왔다’고 둘러대고는 고고장에 들어가 블루스타임에 화장실을 오락가락하며 갈급한 욕망을 해소했던 경험담 등은 놀이문화가 대중문화와 중첩되는 역사적인(!) 전개과정이라 할 만하다.

책을 덮으며 생각난 것은 뜬금없게도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하고 또 하는’ 남자들이었다. 그것은 마치 최면요법처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혹은 폭압적인 기억들을 방출하는 일종의 주문(呪文) 같은 거라고 이해하게 된 것이 최근이다.

금기와 억압에 눌려 차마 말하지 못했던 시절이 이처럼 한 뛰어난 평론가에 의해 화려하게 부활하고 영화, 노래, 다큐멘터리로 끊임없이 재현되는 요즘의 세태도 어쩌면 그때는 말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말함으로써 속도와 성장의 광기를 가라앉히고 내면을 정화하는 일종의 집단 심리치료가 아닐까.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라는 노래가사처럼 바야흐로 ‘소멸과 악수하는 날’은 언제일까.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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