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 칼럼]결핍과 탐닉

  • 입력 2004년 6월 11일 19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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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비스킷’을 보면서 의아했던 점은 경주마 한 마리에 미국 전체가 그토록 빠져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시비스킷’은 1930년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경주마였다. 대공황이 진행되던 1936년에 데뷔해 1940년까지 33회의 우승과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며 미국 최고의 경주마에 등극했던 말이다.

2001년 미국에서 출간된 ‘신대륙의 전설―시비스킷’의 저자 로라 힐렌브랜드는 “당시 미국 최고의 뉴스메이커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클라크 게이블도, 히틀러도 아닌 시비스킷이었다”고 적고 있다. 라디오 실황 중계에 400만명이 귀를 기울였고, 연습 장면을 보기 위해 4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고 한다.

▼중독이 범람하는 사회▼

‘시비스킷’에 대한 열광은 대공황이라는 시대상황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거리에 실업자가 넘쳐나고 끼니를 걱정하던 시절이었다. 대공황의 긴 터널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게 가장 답답했다. 모두가 실의에 빠져 있는 가운데 걸출한 말 한 마리가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다.

‘시비스킷’은 왜소한 체격에 다리가 심하게 굽어 있는 볼품없는 말이었기에 더욱 극적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와 같은 ‘시비스킷’의 승리를 통해 정신적인 위안을 얻으려 했다. 잠시 현실을 잊고 희망과 자신감을 되찾고 싶었던 것이다. ‘시비스킷’에 대한 과도한 열광은 미국을 뒤덮었던 어둠의 단면이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영화 한편이 10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것은 영화산업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지만 사회적으론 정상이라고 볼 수 없다. 영화가 아무리 손쉬운 오락수단이라고 해도 특정 영화에 전 국민의 4분의 1이 관람하는 일이, 그것도 잇따라 일어났다면 별도의 원인과 배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 원인 중의 하나는 ‘현실 잊기’가 될 것이고, 다른 배경은 ‘사회 불안’ ‘경제 침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영화가 답답한 대중에게 잠시나마 위안을 선사한다면 나름대로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되겠지만 독버섯처럼 번지는 각종 중독현상은 예삿일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인터넷 중독이다. 국내 연구결과를 보면 인터넷 중독으로 분류되는 비율이 전체 이용자의 40%로 집계되고 있다. 주변에서 온종일 컴퓨터 앞에 매여 있는 ‘컴퓨터 폐인’을 찾아내는 것은 이제 그리 어렵지 않다.

인터넷 중독뿐인가. 음란물 중독, 도박 중독,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게임 중독 등 어느새 중독이 범람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무엇에 탐닉한다는 것은 뭔가 심하게 결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영화 열풍과 각종 중독 같은 ‘탐닉’의 뒤편에는 청년실업이나 신용불량, 가계부채 같은 ‘결핍’의 단어들이 웅크리고 있다. 생계 불안, 안보 불안에 식품 불안까지 각종 ‘불안’ 시리즈도 탐닉을 부추기고 있다. 환자의 얼굴색이 밝을 수가 없듯이 사회 곳곳에 중병의 징후가 깃들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경제위기가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그런 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병들지 않은 내면을 갖고 있느냐 여부다. 건강한 체질의 사회는 어떤 위기가 닥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과연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불안 잠재울 ‘희망’은 어디에▼

세상은 급속도로 각박해지고 황폐화되고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미덕이었던 양보, 너그러움, 용서, 더불어 살기 같은 소중한 가치들이 급속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국정을 이끌어 가는 정부가 신중하고 안정감 있는 나라 운영으로 희망과 믿음을 다시 세워야 하는데도 리더십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위로받아야 할 국민이 거꾸로 정부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다. 더구나 참여정부가 지난 1년여 동안 국민을 더욱 분열과 대립으로 내몬 책임은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다. ‘결핍’과 ‘탐닉’이라는 시대의 우울을 치유할 희망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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