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동북아시아 공동의 집’…꿈만은 아니다

  • 입력 2004년 6월 11일 17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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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중국 베이징 6자회담에 참석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 이수혁 외교통상부 차관보,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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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와다 하루키 지음 이원덕 옮김/283쪽 1만3000원 일조각

동북아시아에서는 ‘공동의 집’은커녕 특정 문제의 해결을 위한 다자협의체 구성조차 힘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논거는 의외로 간단하다. 동북아에는 고르바초프의 ‘유럽 공동의 집’ 주장에 호응했던 유럽 같은 문화적 동질성도 지리적 인접성도 없으며, 공통의 역사적 경험은 물론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한 사과와 청산의식도 공유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역 국가들의 정치체제와 발전단계 또한 제각각이라는 사실도 지적된다.

고르바초프가 제기했던 ‘공동의 집’이란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정치안보협력을 포함한 지역공동체를 뜻한다. ‘유럽 공동의 집’에 비한다면 한국 북한 중국 몽골 러시아 일본 미국 등 7개국과 하와이, 대만, 오키나와, 사할린, 쿠릴열도 등 5개의 섬 지역으로 구성되는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은 그야말로 ‘유토피아’다. 더구나 내부갈등도 치유하지 못하고 분단 상태로 남아 있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재외한국인들이 공동체 형성의 주역이 돼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민주화를 자력으로 달성하고 현재 분단극복의 길 위에 있는 국민에 대한 격려와 상찬의 립서비스로 들릴지도 모른다.

저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일본 도쿄대 명예교수·근현대사·아래사진)의 1990년 논문 ‘동북아시아에서의 한국과 일본의 역할’이나 1995년 논문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과 한반도’를 읽었을 때 서평자의 느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15년 동안 동북아의 변화를 관찰하고 이를 반영해 완성한 저자의 논지는 이제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수립의 역사적 당위에 관한 정연한 설득으로 읽는 이를 압도해 온다. 북핵문제와 같은 위기의 해결을 기회 삼아 환경문제와 같은 비정치적 문제해결 협의체 형성의 과정을 거쳐 정치안보 공동체 구성까지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저자의 구상은 역사적 사실과 흐름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 위에 서 있다. 저자는 이질성의 혼재라는 동북아의 문제가 극복됨으로써 오히려 동북아가 진정 글로벌한 성격을 띠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애당초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은 꿈같은 일이고, 이 꿈의 실현을 위해 전개하는 논의에는 분명 비약이 존재하기 마련이라고 겸손해 한다. 그러나 개혁적 유토피아주의를 제창하고 그를 통한 신지역주의의 실천을 강조하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서 저자는 현실성과 구체성을 잃지 않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지역협력을 기초로 동북아시아의 지역협력을 창출하자는 방안을 제시하고, 지역협력에 부정적인 각 국가 특히 일본의 대외정책과 자세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미국의 정치군사적, 경제적 지배력을 고려해서 미국도 ‘공동의 집’에 포함시키지만 역시 현 상태의 미국의 존재는 저자에게도 곤혹스러운 듯하다. 그리고 여건은 갖춰져 있다고 해도 문제는 의식이자 의지라는 저자의 고백은 현안을 다뤄야 할 정치사적 논의가 미래에 관한 예언으로 전환될 수 있는 위태로움도 안고 있다.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에 관한 한 저자의 이론적 동지인 강상중 도쿄대 교수(정치사상)의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을 향하여’(뿌리와 이파리)와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다.

이웅현 고려대 연구교수·국제정치학 zvezda@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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