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안세영/지금은 ‘경제실험’할 때 아니다

  • 입력 2004년 5월 13일 19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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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금리 인상 움직임, 중국의 경기 긴축, 고유가 등 세계 경제의 삼재(三災)와 블랙 먼데이의 거센 파도가 한국 경제호를 강타하는데 항해실에선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의 연주 같은 불협화음만 흘러나오고 있다. 이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는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 이정우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과 경제단체장들이고, 대표 연주곡은 대기업계열 금융사의 의결권 제한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대기업집단 소속 금융사가 보유한 다른 계열사의 의결권을 현행 30%에서 15%로 줄이겠다고 입법 예고한 이후 벌어진 상황이 그렇다.

▼‘의결권 제한’ 치열한 논쟁▼

이헌재 경제부총리는 ‘기업투자 위축’을 내세워 반대하고, 정책기획위원장은 공정거래위원장 편을 들었다. 논란이 커지자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12일 정책협의에서 ‘의결권 제한’을 보류키로 했지만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두 위원장은 재벌이 예금주의 돈으로 계열사를 지배하는 것은 잘못된 관행이며 재벌개혁은 계속돼야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재계는 의결권을 줄이면 우리 기업들이 외국의 기업사냥꾼 손에 넘어갈 듯이 야단이다. 하지만 평소 기업경영을 투명하게 잘하면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고, 설사 외국인에게 몇몇 기업의 경영권이 넘어가더라도 국민경제에는 별 문제가 없지 않으냐는 반론도 있다.

언뜻 보기에 의결권 제한 논란은 재벌개혁을 하려는 진보적 실세와 경영권을 방어하려는 재계간의 한판 대결로 보인다. 명분이 모두 그럴듯해 참으로 판단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번 일은 글로벌경제시대의 우리 경제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정책 이슈다.

국내 주식시장에서 외국인 비중은 아시아 최고 수준인 50%에 육박한다. 우리가 자부하는 삼성전자와 포스코의 외국인지분은 각각 57%와 67%에 이른다. 어찌 보면 이들 기업은 이미 한국인이 소유한 기업이 아니다. 단지 경영권이 한국인에게 있을 뿐이다. ‘SK 대 소버린’ 사태에서 보듯, 외국인은 이미 한국 주요 기업에 대해 적대적 인수합병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재계의 경영권 방어 논리가 엄살만은 아닌 것이다. 삼성전자와 포스코도 경영이 부진하면 얼마든지 외국인 주주들이 힘을 합쳐 인수 시도를 할 수 있다.

‘무엇이 우리나라 기업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도 빌 클린턴 행정부 때 자본의 색깔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당시 로버트 라이시 노동장관은 외국인이 미국기업을 인수하더라도 미국 땅에서 고용을 창출하고 세금을 내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주장했다. 반면 로라 타이슨 대통령보좌관은 경제안보론을 내세우며 핵심적 미국기업에 대한 외국자본 침투를 제한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우리가 라이시의 세계주의를 따른다면 재벌의 경영권 방어 논리는 설득력을 잃는다. 그러나 타이슨의 국기(國旗)주의에 따르면 문제가 달라진다. 만약 삼성전자의 경영권을 외국인이 가지면 우리의 국민적 정서가 어떠할까. 적어도 한국경제를 선도하는 핵심 기업들은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선 안 된다. 정부는 이들 기업이 마음 놓고 기술 개발과 투자에 전념할 수 있도록 경영권 방어 장치를 만들어줘야 한다.

▼위기관리팀 제 역할 나서야▼

지금 필요한 것은 정부와 재계, 진보 실세와 경제관료간의 대립이 아니라 대화와 국민적 공감대의 형성이다. 안타까운 것은 학자 출신 위원장들의 훌륭한 소신을 시험하기에 한국경제는 지금 너무 절박한 상황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좋은 개혁도 때를 잘못 맞추면 개악(改惡)이 되고 실패한다. 제2의 경제위기설이 팽배한 포스트 탄핵시대에 필요한 것은 불안해하는 기업과 국민, 그리고 외국인투자자를 안심시킬 수 있는 경제위기관리팀이다. 지금은 진보적 분배·개혁론자들이 나설 때가 아니다.

안세영 서강대 국제대학원장·국제통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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