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병주/가면

  • 입력 2004년 5월 9일 18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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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비롯돼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산대놀음은 한국의 대표적 민속놀이다. 양반이나 파계승에 대한 조롱, 서민과 처첩의 애환 등을 풍자적인 대사와 춤으로 묘사하는 산대놀음에서는 등장인물이 모두 탈을 쓴다. 가령 늦도록 장가 못 간 취발이의 경우 붉은 얼굴, 검은 눈썹, 큰 입의 가면으로 구경꾼들이 극중의 역을 대뜸 알 수 있게 했다. 이처럼 가면극은 연극의 뿌리라 할 만큼 역사가 오래다. 서양 문명의 발상지 고대 그리스에서도 기원전 5세기에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 같은 걸출한 극작가들이 활약했는데 출연자들 모두가 탈을 쓰고 무대에 올랐다.

▷나무나 바가지 등을 다듬어 만든 탈에는 대사 전달을 위해 입 구멍을 뚫어 두기 마련이었다. 극중 등장인물을 뜻하는 ‘페르소나(persona)’는 ‘통하여(per)’ ‘소리(sona) 난다’는 뜻으로 입 구멍이 나 있는 가면에서 유래된 말이다. 연기자가 자기 역에 충실할 때 비로소 제 나름의 품격(personality)이 인정된다. 가령 취발이가 상좌나 먹중의 대사나 몸짓을 가로챈다면 놀이마당은 뒤죽박죽이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가 무엇일까? 가정과 사회에서 자기 탈을 찾아 쓰고 자기 역할을 제대로 연기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어른이 실종된 가정, 지도자가 딴전을 피우는 정계, 열심히 일하기보다 경영 참여에 관심이 큰 노동계, 학업보다 정치적 과외활동에 마음을 둔 학생운동권 등이 우리 사회가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분명한 조짐들이다. 용천역 폭발 사고를 겪은 북한도, ‘컬러TV 50대’ 요구에도 한마디 군말 없는 우리도 모두 구호품을 주고받는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며칠 후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이 나올 모양이다. 재판관들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 궁금하다. 문제의 발단은 대통령의 역할 수행에 대한 견해차에 있었다. 어찌 되든 판결 후 대통령의 첫 반응이 궁금하다. 바로 이 장면에서는 오기를 부리고 싶은 충동을 접고 반대측도 아우르는 지도자다운 금도를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래야 대통령도 살고 나라도 산다. 취발이가 양반 역이 아니듯 양반 또한 취발이가 아니다.

김병주 객원논설위원·서강대 명예교수·경제학

pjkim@ccs.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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