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익칼럼]개혁 세대에게 바란다

  • 입력 2004년 4월 28일 19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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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명의 기폭제가 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르네상스기의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았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미시사(微視史)의 대가 필립 아리에스가 쓴 ‘사생활의 역사’(이영림 역, 새물결)에 의하면 문자해독률이 급속히 증가하던 이 시기에 인쇄기로 책의 출판과 보급이 활발해지는 것에 대한 반대와 우려도 만만치 않았다.

‘식자우환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비관주의는 우선 오류가 많은 인쇄술로 텍스트를 훼손한다는 것, 둘째로 부도덕하고 이단적인 것들을 마구 유포한다는 것, 셋째로 무지한 자들에게 지식을 노출시켜 왜곡시킨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들었다. 그래서 “펜이 숫처녀라면 인쇄기는 매춘부”란 말까지 나왔다.

▼컴퓨터에도 타자기 시대의 문자판▼

지난 반 세대 동안 우리 사회에 급속히 보급된 컴퓨터와 인터넷에 대한 반감도 구텐베르크 시대의 그것과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종이책의 권위가 전자책의 보급으로 마구 훼손되고 있다는 것, 인터넷으로 제공되는 정보의 대부분이 포르노와 쓰레기라는 것, 온라인의 거센 작동이 우중(愚衆)의 포퓰리즘에서부터 청소년 게임마니아들에 이르기까지 이성과 합리를 마비시킨다는 비판이 그렇다. 새 문물은 이렇게 ‘러다이트 운동’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세월이 흘러 새 기술에 익숙해지면 해소되기 마련이다.

이런 가운데에도 익숙한 것에 집착하는 심리적 속성이 있고 그것이 합리적인 개선을 이겨내는 경우도 있다. 과학사학자 홍성욱이 ‘잠금의 효과’라고 소개하는 예가 그렇다. 컴퓨터의 영문자판(QWERT)은 전날의 타자기에서 쇠막대가 엉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고안된 문자 배열이다. 컴퓨터는 쇠막대가 엉킬 염려가 없으니 문자 배열을 개선하면 40% 이상 타자 능률이 오를 터인데 컴퓨터업자들은 이 자판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사용자들이 길들여진 타자의 친숙성을 배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구 시대의 접변기에 발견되는 이 흥미로운 현상은 역사가 단선적으로 전개되지 않고 추동과 길항의 착잡한 역학 관계를 감추며 움직여 왔음을 보여준다.

4·15총선의 결과를 보면서, 그리고 그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정치 경제적, 사회 정신적 흐름을 되짚어보면서 문화 접변에서의 마찰과 잠금의 효과, 그리고 그 한계를 나는 떠올렸다.

우리는 30여년 동안 ‘3김 정치’란 말로 요약되는 익숙한 행태와 ‘386세대’로 대변되는 새로운 동태의 대결에서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음을 보았다. 이 변화의 징조는 이미 나타나 있었다. 아주 가까이 2002년 월드컵 때의 ‘붉은 악마’, 여중생 죽음에 항의하는 ‘촛불시위’, 대통령선거 때 ‘노사모’와 네티즌의 온라인 열풍은 시대와 그 시대의 주체가 바뀌고 있음을 충분히 예고했다. 야당의 대통령 탄핵에 대한 대중적 반발,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국회 판세의 역전은 그러니까 예상될 수 있는 결과였다.

▼변화 부적응 국민도 감싸안아야▼

구시대적 정치에 익숙한 세대는 ‘잠금의 효과’에 젖어 이 변화를 읽어내지 못한 채 오히려 반감과 위기감을 키웠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는 그 효과의 한계를 돌파해 새로운 소수를 큰 주류로 확대했다. 문화 접변의 갈등에서 변화를 두려워하는 집단은 새로운 흐름을 가볍게 보거나 무력하게 대응했고 개혁 추구 집단은 자기 세대의 새로운 방법과 도구를 효율적으로 사용해 오늘의 시대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역사의 변화가 현실의 선택으로 수용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혁 세대에 두 가지 점을 환기시키고 싶다. 첨단의 컴퓨터도 소비자들을 위해 오래된 타자기의 QWERT자판 배열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 변화의 부적응자도 변화의 수혜자들과 함께 싸안아야 할 국민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정당 투표는 진보 쪽이었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보수주의자인 모양이다.

김병익 문학평론가·인하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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