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익칼럼]‘決死의 고집’이 두렵다

  • 입력 2004년 3월 31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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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그의 저서 ‘알이 닭을 낳는다’(2001)에서 재미있는 자연 생태의 실례를 많이 이야기해주지만 ‘크고 흉악한 동물도 필요한가?’(2003)에서도 생물의 착잡한 먹이사슬 관계를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미국 케이밥 고원의 사슴 이야기다.

▼계획대로 안되는 것이 세상이치 ▼

1906년 동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될 때 이 지역에 4000마리의 사슴이 살고 있었다. 이 사슴을 보호하기 위해 퓨마, 늑대 등 육식동물들을 6000마리나 제거했다. 그래서 늘기 시작한 사슴의 개체수는 17년 만에 7만마리로 증가해 ‘진보적 보호정책의 효과’를 톡톡히 거두는 듯했다. 그러나 이즈음부터 사슴의 개체수는 오히려 줄어들기 시작해 1939년에는 겨우 1만 마리만 생존하고 있었다. 너무 늘어난 사슴들이 먹을 게 없어 식물의 어린 싹까지 먹어치웠고 끝내 식량 부족을 견디지 못해 죽어간 것이다.

최 교수는 또 페인 박사가 행한 바닷가 암석해안 지역에서의 실험도 인용하고 있다. 실험지역에서 불가사리가 보일 때마다 수시로 제거하자 6개월 만에 불가사리는 없어졌지만 새로운 따개비종이 정착하기 시작했고 홍합이 풍부해졌다. 이 때문에 바위 공간이 줄어들어 해조류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해조류를 먹는 초식동물들도 연쇄적으로 사라졌다. 흉악한 불가사리가 없어지면 더 풍부해지리라고 예상했던 생물 종수가 오히려 15종에서 8종으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자연은 인간이 의도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때로는 의외의 결과를 생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다.

그런데 언젠가도 소개한, 덴마크의 통계학자 비외른 롬보르는 농약의 위험성에 관한 지나친 걱정을 오히려 우려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 이후 농약의 해독이 심각하게 제기되어 채소와 과일에 농약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그 허용 기준치를 쥐 실험으로 계산한 영향 가능성의 100분의 1로 정하고 있다.

롬보르의 ‘회의적 환경주의자’는 이 조치가 암 발생률을 줄이기는 하겠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반대한다. 잔류 농약으로 사람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은 100만분의 1로, 그 위험성은 포도주 0.5L를 마실 때 일어날 수 있는 간경화증 발병률, 자동차가 480km를 달려 만날 수 있는 사고율, 원자력발전소 반경 150km 안에서 150년간 살 때의 위험성 정도로 아주 하찮은 것인데도 지나치게 과장됐다는 점이 그 한 가지 이유다. 둘째는 농약을 사용하지 않으면 채소가 귀해지고 값이 비싸져 가난한 사람들이 그걸 충분히 사먹을 수 없게 돼 그만큼 암 예방력이 약해진다는 것이다. 그가 걱정한 것은 작은 위험을 피하려다 오히려 더 큰 손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세상은 의도와 기획대로 잘 될 리도 없고 오히려 예상이 빗나가는 것에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결과란 으레 당초의 목적을 배반하는 데서 그 참된 의미를 드러내기도 하고 좋은 뜻이 나쁜 결말을, 반대로 악의적인 시도가 의외로 훌륭한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 그래서 ‘전화위복’이며 ‘새옹지마’란 말도 생겨났을 것이다.

▼전화위복 새옹지마 되새길만 ▼

앞서의 그 배반의 사례들은 자연 생태계와 인간의 운명에도, 그리고 물론 사회적 생태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게으른 운명론자가 되어 의도와 결과의 반전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 탄핵의 후폭풍에서 나타난 일련의 파동을 보며, 무엇에 대해 절대 반대하고 혹은 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결사(決死)’의 고집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를 벗어나기 위하여’에서 ‘회의 없는 확신’에 대한 에드가 모랭의 회의에 21세기 초의 내가 공감하고 있는 것이고, 그 절대 신념의 몽매주의를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다.

김병익 문학평론가·인하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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