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영균/부총리가 경제 책임진다지만…

  • 입력 2004년 3월 24일 19시 00분


코멘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약 300년 동안 부를 누려 왔다는 경주 최 부잣집 가훈의 한 대목이다. 벼슬이 높아지면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가문을 지키기 어렵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최 부잣집 가훈은 요즘 기업인들에게도 좋은 교훈이 될 법하다. 많은 기업인이 ‘정치인과 거래한 죄’로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부터 불법 정치자금 때문에 수사를 받던 기업인 등 지도급 인사들이 잇달아 목숨을 버리고 있다. 지난해 8월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회장, 지난달 안상영 부산시장이 자살한 데 이어 11일에는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이 한강에 투신자살했다.

이들의 자살에는 비슷한 점이 있다. 돈과 정치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그렇다. 돈을 받는 측이거나 주는 쪽이거나 떳떳하지 못한 거래를 했다는 혐의로 수사를 받았고, 그 배경에는 정치적인 문제가 감추어져 있다.

남 전 사장의 빈소를 찾았던 정치인들이 조문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문상을 거절당한 이유는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죽어서까지 정치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를 꺼려 동료와 가족이 거부했으리라.

남 전 사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친형 건평씨에게 3000만원을 건넨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아 왔다. 11일 자신을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발언을 한 노 대통령의 기자회견 직후 한강에 몸을 던졌다지만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자살이 극단적인 선택이듯이 그의 죽음은 시련을 겪고 있는 기업인들의 극단적인 모습일 수도 있다. 대선자금 수사 이후 기업과 기업인들의 정치 기피증은 극에 달한 듯하다. 기업들은 정치권에서 멀어지려고 기를 쓰는 모습이다.

그러나 큰 기업을 하면서 정치에서 멀어지기란 힘든 일이다. 정치를 외면하고 기업을 꾸려 나가기도 힘들거니와 정치인들이 가만 내버려 두지도 않을 터이다.

오죽하면 정치인들과 가까운 곳에 있는 기업들은 성치 못했다는 말까지 나올까. 여의도 국회에서 가까운 K그룹이 쓰러졌고, 서울의 종로통 북쪽 청와대에서 가까운 곳에 사옥이 있는 H그룹도 무너졌다는 얘기는 허무맹랑하지만 한편으론 기업인들의 심정을 헤아리게 한다.

요즘 기업인들이 최 부잣집 선조들처럼 가훈을 물려준다면 아마도 이런 내용이 되지 않을 까 싶다. 첫째, 정치를 멀리하라. 둘째, 좋은 학교를 나오지 말라. 셋째, 기업을 키우지 말라. 이런 가훈을 잘 지켜야 300년은 아니더라도 3대쯤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대선자금 수사에 이어 탄핵과 총선 정국의 와중에서 왜소해져 보이는 기업인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탄핵 사태가 터진 뒤 이헌재 경제부총리는 ‘경제는 내가 책임진다’고 했다지만 과연 기업인들이 얼마나 안심하고 있을까. 경제부총리가 바뀌면 정책도 하루아침에 바뀌질 않았던가. 이 부총리가 사무실 벽에 걸었다는 ‘기업부민(起業富民)’이란 액자의 정신도 바뀌지 않을까. 기업인들이 무거운 마음을 뒤로 하고 기업 경영에 전념하게 하려면 이 부총리는 이런 기업인들의 마음도 헤아려 봐야 할 것 같다.

박영균 경제부장 parky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