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9년 문익환 목사 평양 방문

  • 입력 2004년 3월 24일 18시 41분


코멘트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윤동주의 마음으로, ‘모든 통일은 선(善)’이라고 외쳤던 장준하의 마음으로 여기에 섰습니다.”

‘분단시대의 통일꾼’ 문익환 목사. 1989년 3월 그가 평양 땅을 밟았다. “걸어서라도 평양에 가겠다”던 당시로서는 소름끼치는(?), 문 목사의 시 제목 그대로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결행한 것이다.

문 목사가 김일성과 ‘사회주의식 포옹’을 나누는 장면이 전해졌을 때 국민들은 두 눈을 의심해야 했다. 그 완고했던 냉전(冷戰)의 한 모서리가 깨져나가는 충격에 휘청했다.

독실한 목회자의 한길을 걸었던 그가 현실에 눈을 뜬 것은 ‘느지막이’였다. 그의 절친한 친구 장준하가 변사체로 발견된 1975년 그 어름이었다. 그래서 50대 후반의 이 ‘늦둥이’는 스스로 아호를 ‘늦봄’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문 목사는 ‘3·1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해 숨 막히던 유신체제에 도전한다. 박정희 정권의 시퍼런 칼날에 맨몸을 들이대었다. 그리고 한번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들자 그는 집보다 감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옥살이는 화려(?)했다. 짧게는 11개월, 길게는 34개월. 6차례에 걸쳐 11년2개월을 철창 속에서 보냈다. 주변에서 수감을 안타까워할 때마다 간디의 말로 대신했다. “신랑이 신부 방에 들듯이!”

방북 당시 ‘친북(親北)행적’으로 논란이 일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담당검사에게 내가 그랬지. 그래 찬양 고무했다! 만날 욕하고 그러면서 통일이 되겠어? 상대방의 좋은 점을 자꾸 찾아내 찬양 고무해야지.”

방북이 감상적이라고? 환상적이라고? “그것은 시적(詩的) 투시력과 정치적 리얼리즘의 결합이야. 시인의 눈으로 ‘역사의 저쪽’을 꿰뚫어봐야 해. 그러지 않고는 남의 손으로 묶인 ‘역사의 매듭’을 풀 수가 없어.”

그 무엇보다 시인으로 불려지기를 원했던 문 목사. 그는 시에서도 ‘남(南)누리 북(北)누리 한누리 되는 날’을 간절히 기도했다. “이 땅의 아리따운 봄 향내, 당신의 애기를 낳으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통일의 애기는 ‘늦봄’에 잉태되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