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93년 올브라이트 중국 방문

  • 입력 2004년 2월 23일 18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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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백마 탄 왕자였으며 나는 신데렐라였다. 유리구두를 신어보니 발에 꼭 맞았다.”

미국 최초로 여성 국무장관을 지낸 매들린 올브라이트. 그는 웰즐리대학 재학시절 부유한 언론가문 자제인 조지프 올브라이트를 만나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다. 11세 때 미국에 건너온 체코 외교관의 딸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달콤했다.

그리고 그의 나이 마흔 다섯, 결혼생활 23년째에 접어들던 어느 날. 세 아이의 엄마는 남편에게서 이혼 통고를 받는다. “당신보다 더 젊고 예쁜 여자가 생겼어….” 남편은 그날로 짐을 쌌다.

“내가 이혼하지 않았더라도 국무장관이 될 수 있었을까. 결혼한 상태였다면 지금처럼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솔직히 남편보다는 국무장관을 하는 쪽이 더 좋다.”

올브라이트. 그는 미국 외교가의 대표적인 강경론자다. 인권문제와 지역분쟁에서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개입을 강력히 주장해 왔다.

그의 개입주의 노선은 조국 체코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던 유년시절의 쓰라린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전쟁을 원치 않았던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와 ‘뮌헨협정’을 맺고 체코의 뒤통수를 쳤다. “내 사고의 밑바탕은 뮌헨이다.”

그의 전매특허는 ‘직설화법’이다.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톡 쏘듯 쏘아대는 말투는 국제 외교가를 적잖이 당혹스럽게 했다. ‘사나운 할머니 올빼미’였다. 그러나 그가 ‘솔직하고 유쾌하다’는 데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엔대사로 있던 1994년 이라크 언론은 그를 ‘독사’로 묘사했다. 그는 이후 이라크 각료를 만날 때면 똬리를 튼 뱀 모양의 브로치를 달고 나왔다. 중동평화협상이 얽힌 실타래처럼 꼬였을 때는 거미줄 문양. 그는 ‘센스’를 아는 외교관이었다.

1997년 덩샤오핑 사망 직후 자신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 중국에서 ‘인권문제’를 거론하는 뚝심을 보였다. 그는 ‘불도저’였다.

그리고 그는 자칭 미국의 ‘자애로운 헤게모니’를 추구했다.

2000년 7월 아세안안보포럼 폐막 만찬에서 당시 탕자쉬안 중국 외교부장에게 이런 의미심장한 노래를 불러준다. “만약 당신의 사랑이 식는다면 나는 미 제7함대를 부를 거예요….”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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