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07년 소설가 이효석 출생

  • 입력 2004년 2월 22일 18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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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다. 정말로! 감쪽같이 몰랐다! 광복(光復)이 되리라고는….”

생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친일(親日) 고백’을 했던 미당 서정주. 우리 근현대 문학사의 어두운 골짜기에 울려 퍼졌던 미당의 절규는 아직도 ‘이명(耳鳴)’처럼 귓전을 맴돌고 있다.

우리 문학사의 아킬레스건, 친일문학. 그 친일문학의 아픈 흉터를 더듬을 때 만나는 흥미로운 인물이 바로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이다.

그는 친일파였나? 이 곤혹스러운 질문을 좇았던 이상옥(서울대 명예교수)은 그의 문학 행로에서 아주 ‘특이한’ 발견을 하게 된다.

이효석도 일제 말기에 일본어로 글을 썼다. ‘국어’로 작품을 썼다. 당시 국어는 일본어였고, 한글은 ‘언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삐딱했다’. 많은 작가들이 전시(戰時)의 ‘국민문학’을 선양하고 있을 때 그는 전혀 ‘시국의 여망’에 부응하지 못했다.

1940년 4월 경성일보에 실린 글을 보자. 그는 일제가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내놓은 ‘노연만두’라는 보리빵에 대해 이렇게 혹평한다. “많은 문자를 써서 세세하게 설명하고 국책 운운하며 방패를 삼아보아도 맛이 없는 것은 결국 맛이 없다….”

그의 작품들도 전시문학의 ‘진지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단편소설 ‘은은한 빛’에서 주인공은 일본에 고구려의 고검(古劍)을 팔아넘기라고 하자 이렇게 다그친다. “그 물건의 값어치를 알지 못한다면 이 땅에 태어난 걸 수치로 알아야 합니다. 그건 오랜 영혼의 소리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이국(異國) 정취와 탐미주의를 열렬히 추구했던 이효석이 아닌가. “우리말로 자유로이 글을 쓸 때는 억제돼 있던 민족의식이 일본어로 글을 쓰면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일까.”

이효석은 잠시 총독부에 취업하기도 했으나 끝내 친일 문인의 길을 거부했다.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 그는 1942년 뇌막염으로 세상을 떴다.

“그가 더 살았더라면 어떤 글을 쓰게 됐을지 궁금하다. 내선일체와 ‘대화혼(大和魂)’을 부르짖던 일제의 강압 아래서 오히려 그의 작품은 민족의식을 싹틔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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