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라스트 댄스'…시-그림에 투영한 性-전쟁-죽음

  • 입력 2004년 2월 6일 18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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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댄스/귄터 그라스 시·그림 이수은 옮김/100쪽 1만6000원 민음사

시가 춤춘다. 거친 선으로 그려진 그림 속의 남녀가 춤춘다.

‘가라앉아버린 배와/아직도 울리고 있는 비명을/책으로 요약하고 나자, 나는/흥을 돋워줄/무언가를 만들고 싶어졌다./그래서 묵은 냄새를 풍기는/축축한 찰흙으로 형상을,/움직이는, 안이 비어 있는,/남녀를 빚었다. 두려움/너머에서, 공간을 채우며/춤추는 한쌍을.’(‘신·神처럼’ 중)

199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독일작가 귄터 그라스(77)가 성(性), 전쟁과 죽음에 대한 시와 자신이 그린 그림을 함께 묶었다. 연필과 목탄, 색연필로 그린 그라스의 그림에는 리듬이 실려 있다.

독일의 시인 한스 엔첸스베르거는 그라스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잘 길들여진 독일 문단에 나타난 야생의 괴물.” 그라스는 교양이나 관념에 몰두해 온 독일문학의 전통을 따르기보다는 비극의 역사를 ‘알레고리’라는 문학적 장치를 통해 미학적으로 그려 왔다. 이번 시집에서 그라스는 원스텝, 탱고, 래그타임, 블루스 등 다양한 춤으로 무대를 누비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춤꾼은 늙었지만, 여전히 열정적인 발놀림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군화를 신은 사내들이 동쪽 멀리로 떠났을 때, 그라스는 ‘스텝을 밟는 동안에는/웃을 일도 울 일도 없다,/슬프지도 기쁘지도 않다’(‘일찍 배웠다’ 중)고 말한다.

탱고는 ‘격한 떨림에서 고요를 향해 가는 것’(‘한밤의 탱고’ 중)이며, ‘그때, 전쟁에서 남겨진 우리는/럼주 맛이 나는 뜨거운 음료를 마시며/여전히 말없이/변두리 댄스홀에서 우리 자신에게/ 살아남았음을, 그리고 또 몇 가지 재주가 있음을/보여주려 했었다.’(‘언젠가 뢰벤부르크에서’ 중)

그라스는 뒤셀도르프대에서 판화를, 베를린조형예술대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1977년 수채화 분위기의 그림과 시를 함께 담은 ‘글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을 위한 습득물’이라는 책도 펴낸 바 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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